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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고 듣기

[펌] 계단·난간투성이 너무 친절한 등산길 이건 산이 아니다

by 숲길로 2013. 12. 14.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자란 탓에 산과는 일찍 친해진 편이다. 굳이 등산이랄 것도 없이,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산이었으니 또래 아이들과 올라가 한나절 놀다 오면 됐다. 군에 입대해 높고 낮은 산을 오르내리며 훈련받을 때도 크게 힘든 줄 몰랐다. 물론 팽팽하게 젊을 때 얘기다. 재작년 난생처음 1박2일로 지리산 종주란 걸 하면서 혀가 빠질 만큼 고생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설악산 대청봉은 바짝 치고 올라갔다가 후다닥 내려오는 맛이라도 있는데, 지리산은 워낙 품이 깊어 오르락 내리락만 계속되고 끝은 보이지 않는 고달픈 산행이었다.

 

 최근 몇몇 산과 제주 올레길을 본떠 ‘○○길’로 이름 붙인 길들을 다니면서 의문과 불만이 커졌다. 인공시설이 너무 늘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나무를 베어내고 바위를 부숴 길을 낸 것도 모자라 곳곳에 나무·철제 계단과 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설악산만 해도 몇 년 사이에 계단이 너무 많이 들어섰다. 물론 도심 주변이나 유명 관광지 일부는 노약자나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게끔 해줄 만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도 덕유산 구천동 계곡, 주왕산 주방 계곡, 치악산 금강소나무숲길,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장애인·임신부나 유모차도 다닐 수 있는 ‘장애 없는 탐방로’를 만들어 며칠 전 개방했다.

 

 일반인에게 등산은 즐거움과 고됨·위험이 공존하는 행위다. 편한 것만 추구한다면 굳이 산을 택할 까닭이 없다. 안전만 생각한다면 산으로 갈 이유가 없다. 그냥 63빌딩 꼭대기까지 비상계단을 통해 오르는 게 안전하다. 기본 중의 기본은 자기책임 원칙이다. 어제 한 신문 독자투고란을 보니 ‘지리산에서 13시간 산행을 하고 밤늦게 장터목 산장(대피소)에 도착한 50대 여성이 다리 통증과 피로를 호소하는데도 불구하고, 대피소 직원은 예약을 하지 않았다며 하산을 요구했다’는 사연이 있었다. 딱하긴 하지만 당장 드는 소박한 의문. 산행계획을 어떻게 세웠길래 밤늦게 예약도 안 된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산에 오르려면 산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하고, 최악의 경우 자신을 지킬 대책이 있어야 한다. 지난해 국립공원에서 숨진 사람이 16명인데, 가장 많은 9명이 심장질환 등 ‘신체결함’ 때문에 사망했다. 무리한 나들이가 빚은 비극이란 얘기다.

 

 조금 험한 곳이라도 인공시설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본다. 도시 교통이나 아파트 놀이터 같은 주거·생활시설은 최대한 안전을 기해야 마땅하나 자연만큼은 다르다. 과잉친절 과잉보호는 시민의 자기책임 원칙을 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산을 찾는 맛을 깎아먹는다. 가뜩이나 원시(原始)를 경험하기 힘든 우리나라다. 나는 난간·계단과 등산회가 나뭇가지에 단 리본투성이인 산은 싫다.

 

        -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중앙일보 2013.11.03일자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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