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없이 존재를 증가시켜선 안 된다.’
핵심 열쇠는 감추고 의혹만 부풀려나가는 천안함 사태를 보며, 오캄의 면도날이라 불리는 저 명제를 떠올리는 건 나 뿐만은 아닌 듯하다. 달리 표현하면, 진실은 덧붙인 것이거나 복잡하지 않다, 가장 단순한 답이 가장 설득력있고 올바른 답이란 얘기인데, 지금은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서양 중세 스콜라학자의 저 경험칙이 새삼 회자되는 현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대한민국 2010은 아직도 중세 이전 이성의 암흑기란 뜻인가.
다수의 생존자가 있는 교통사고에 비유될 수 있는 천안함 사건의 진상을 알려줄 실제적이고 명백한 증거들은 많다. 얼핏 생각나는 몇 개만 들어보자.
먼저, 생존자들의 폭넓고 솔직한 증언들이다. 배에 탔던 모두가 알고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말할 수 있는 자는 산 자들이다. 허나 아직 믿을만한 그들의 증언은 들리지 않는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둘째, 침몰 전후 얼마 동안의 KNTDS(해군전술지휘시스템)에 대한 신뢰성 있는 분석 공개이다. 서해교전 때는 지나치리만치 자세히 공개되었지만 이번엔 완강히 공개를 거부하는 거기엔, 기동 중이던 천안함의 이동경로와 침몰하는 천안함의 상황, 나아가 그 상황에 대한 각종 대응과 보고와 지휘 기록까지 담겨 있다. 거기에 각종 일지 기록들을 더하면 사건은 입체적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셋째, 천안함 침몰 당시를 포함한 전후 수십 분간, 해안에서 관측된 TOD(열상감시장비) 기록의 공개이다. 우범지대 감시하는 CCTV와 같은 TOD 관측 기록은, 당국은 부인하지만, 일몰 후부터 일출까지 빈틈없이 기록된다는 게 예비역들의 증언이다. 거기엔 보고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그 상황들이 다 담겨있을 게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것들은 침몰 당시의 상황을 알려줄 가장 직접적이고 믿을만한 주객관적 증거들이다. 그럼에도 어느 하나 속시원히 공개되지 않고 있는 건 무슨 이유인가.
건져 올린 배를 조사한다지만 그것은 위의 증거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부족한 점이 있을 때 보완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또 침몰 원인 규명 이후 좀 더 면밀한 분석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건 직후, 내 집 마당 농구공도 찾아낸다는 세계제일의 정보력을 지닌 미 국무부는 사고원인이 ‘함선 자체 문제라 알고 있다’고 간략히 발표했고, 며칠 후 한국 최고정보기관 국정원장은 국회 증언에서 ‘북한 관련은 없는 걸로 안다’ 고 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시종일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각종 의혹들을 조물락거리며 아님 말고~ 식의 썰을 풀어대더니, 이젠 대 놓고 비접촉 어뢰에 의한 피폭이라 주장한다. 석연찮은 그 주장에 뒤따를 당연한 의문에 답하려면 또다시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은 온갖 증거들을 태산같이 늘어놓아야 할 것이다.
난 저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한다.
‘필요없이 존재를 증가시켜선 안 된다.’ 는 명제를 다시 생각하자. 인과율이 지배하는 경험 세계의 진실을 밝히는 과학에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명백한 증거들이지 저 숱한 의혹들이 아니다. 끝없이 의혹만 제출하며 국민을 기만하고, 핵심 증거는 감추는 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가장 믿을만한 증거들을 배제하면 가장 유력한 가설 또한 배제되기 쉽다. 결정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엄청난 돈과 시간 낭비하며 시의성 없고 모호한 증거들을 찾겠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당수 언론에서 이성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정말 미신과 신비주의 난무하는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걸까.
천안함과 함께 이 나라의 이성 또한 침몰해 버린 걸까.
春來不似春,
아직도 중세의 미망에서 허우적대는 2010 대한민국.
돌아오지 못한
여섯 원혼들 깊이깊이 누워있을 서해바다만큼이나 춥고 어둡다.'세상 보고 듣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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