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삼양리 상양 마을회관(09:00) - 아랫재(10:00) - 심심이골 - 큰골 합수점(12:00) - 사리암 주차장(왕복) - 가지 북릉 - 가지산 북봉(15:30) - 북봉 서릉 - 심심이골 - 아랫재 - 삼양리(19:00) 소풍 모드로 산책하듯 10시간
그저께 가지 못한 심심이골을 간다. 가을 숲의 저 열기가 식어버리기 전에...
이번엔 삼계리쪽 대신 삼양리를 들머리로 잡는다.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아랫재도 궁금하고 고개 전후 계곡 단풍을 모두 감상하기 위함이다.
수확 앞두고 발갛게 익어가는 얼음골 사과밭 사이를 걷는다. 아침 공기에 실려오는 과일향이 상쾌하다. 마을 끝자락에서 억새밭 굽어보며 숲길로 접어든다. 곧 길이 환해진다. 단풍빛 하늘을 이고 꽃잎으로 수놓은 비단길 밟으며 천천히 오른다. 황홀한 아침이다...
아랫재. 가을비 부슬거리던 오래 전 어느 날 더운물 한잔 얻어 마셨던 산방 문은 잠겨 있다.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고 흐린 하늘 아래 높이 솟은 북봉은 아직 구름 한 조각 물고 있다.
맘속으로 빌어본다. 흐린 아침이여, 어서 깨어나라! 저 구름 가시고 맑은 햇살 내려서 진종일 고운 단풍길 되어라...!
샘터에서 물 한잔 마시고 둘러보니 깊어가는 가을 숲에 둘러싸인 꽃멍석 한 자락... 시야 가득한 단풍숲은 걸음을 붙들고 끝없이 이어지는 낙엽꽃길은 어서 오라 유혹한다. 즐겁고도 고통스런 갈등...
천천히 걷는다. 가지산 북봉 서릉 초입도 살펴야 하는데 그윽한 단풍숲길에 취해 정신은 자꾸 먼 곳으로만 흩어져 사라진다. 한참 후에 지도를 꺼내보니 북봉 서릉 길은 아마 지나쳐 버린 듯하다. 아무렴 어떠랴, 심심이골 끝까지 가서 북릉으로 올라 서릉으로 내려오면 되지. 지금 이 순간만은 이 길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사진 찍느라 갈팡질팡하는 사이 앞서 걷던 아내조차 시야를 벗어난다. 홀로 가는 길은 고요하다. 바람조차 들지 않는 깊은 숲 속, 낮게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낙엽 지는 소리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느리게 펼쳐지는 황홀한 꿈을 꾸듯 단풍숲길을 걷고 걸어 큰골 삼거리.
이제 가지 북릉으로 올라야 하지만 굳이 능선을 오를 이유가 있을까? 큰골을 따라가다가 사리암 주차장에서 되돌아와 심심이골을 다시 거슬러 가자. 하늘도 점차 개이고 있으니 게으른 점심 먹고 일어나면 낮아진 오후햇살에 단풍빛은 더욱 고우리라... 아내도 같은 생각이다. 여태 게을렀으면서도 그리 맘먹으니 더욱 여유로워진다.
그러나 사리암 주차장에서 되돌아오는 동안 맘이 변한다.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 너무 느리게 걸으니 몸도 식고 단풍빛을 바라보는 마음도 식은 탓일까. 가보지 못한 북봉 서릉에 대한 욕심이 슬며시 돋아난다.
심심이골 초입 삼거리에서 점심 먹고 북릉을 오른다.
서너 해만에 오르는 북봉은 마지막 암릉 구간에 로프가 좀 많아진 듯하다. 북봉은 가파른만큼 사방 조망이 좋다. 굽어보는 북봉 서릉의 암릉미도 제법이다. 그러나 햇살이 부족하여 산빛은 좀 아쉽다.
서릉 하산길은 최근에 달린 듯한 리본이 뚜렷한데 ‘비늘능선’이라 적혀 있다. 비늘이라니?? 능선 상단의 바위들이 비늘을 꽂아놓은 듯하다고 그리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생뚱맞고 너무 주관적인 이름이다. 또 어떤 산행기에는 북서릉이라 하는데 그 역시 북릉과 혼동할 우려가 있다(북릉이 실제론 서북향이다). 가지산 북릉과 북봉이 나름의 객관성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라면, 그 관점에서 북봉 서릉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치 않을까 싶다. 운문 북릉, 범봉 북릉 따위처럼.
북봉 서릉의 암릉구간은 짧지만 제법 까칠한 맛이 있다. 그러나 암릉구간이 끝나면 그다지 좋은 코스는 아닌 듯하다. 가지산에선 흔치 않게 산죽이 많은 능선인데 조망도 거의 없다. 걷기 좋고 보기 좋은 활엽숲이 이어지며 곳곳에 멋진 소나무들이 성성한 북릉길보다 재미가 덜한 거 같다.
다시 심심이골. 아침에 놓쳤던 북릉 초입을 확인한다. 리본과 페인트 등 표시가 뚜렷하다. 왜 못 봤을까? 알고 보니 아랫재에서 가면 북봉 서릉 들머리 직전에서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오래 전 기억인데, 심심이골은 워낙 펑퍼짐하게 너른 탓에 굳이 주 등로랄 것도 없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왔던 듯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야 서릉 초입 표시가 보이는데 우리는 단풍 숲을 두리번거리며 왼쪽길로 갔던 것이다.
잠시 앉아 쉬다가 다시 걷는데 밟히는 낙엽의 감촉이 다르다. 길이 아니다. 어둠 밀려드는 심심이골, 저 위에 아랫재 하늘이 보인다. 대충 치오르지 뭐, 너덜을 따라 오른다. 그다지 힘들진 않지만 별 재미가 없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좌우로 길을 살피지만 보이지 않는다. 밤길에 낙엽 수북한 바위가 그게 그거 같다. 자칫하면 애 좀 먹겠네... 슬슬 낭패감이 든다. 지도를 꺼내보니 오른쪽이겠다. 어렵지 않게 다시 길로 접어든다.
바람 찬 밤 아랫재. 랜턴 불빛에 비치는 억새를 배경으로 하늘금 긋는 북봉을 돌아본다.
총총 내려서니 마을 불빛이 보인다. 여유로웠지만 열시간 산행길은 제법 고되다.
며칠 사이로 다녀온 가인계곡과 학심이골 심심이골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들이다.
규모있는 폭포와 암반을 품은 학심이골은 화려한 맛이 좋다. 그러나 깊은 협곡을 에둘러 오르며 천m 이상의 능선에 이어지므로 조금 힘이 드는 편이다. 반면 심심이골은 심심할 정도로 단조롭고 수월한 길이지만 깊고 그윽한 단풍 숲길을 흘러가는 맛이 최고라 할 만하다. 다만 은근히 돌길이 많은 게 흠이다. 가인계곡은 화려하지 않지만 호젓하고 그윽하다. 무엇보다 6km이상 되는 전구간 대부분이 부드러운 오솔 흙길이라 여유롭게 걷기엔 그만이다.
(단풍철을 기준으로) 내 멋대로 평가한다면, 걷는 맛은 가인계곡, 보는 맛은 학심이골, 단풍숲에 파묻히는 맛은 심심이골...
이제 운문산릉의 천문지골과 대비골(대비사쪽)이 궁금하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할 성 싶다.
아랫재를 향하여
묏자리 한번 멋지다. 누굴까? 천황봉을 바라보며 단풍 그늘에 누운 이는...
곁에 단풍이 있어 가을엔 솔숲도 덩달아 아름다워진다
아랫재에서 북봉을 보며
심심이골에선 누구나 걸음이 느려진다
단풍숲 가운데 철늦은 달맞이꽃밭?
길은 낙엽꽃 비단길, 하늘은 단풍숲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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