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위성사진(이하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퍼 온 것임)
방콕의 밤 공항. 비용 아끼려 경유시간 긴 표를 샀는데 약삭빠른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길 모르는 낯선 밤거리에서 피곤한 몸 할 일이 마땅찮다. 망설임 끝에 트랜스퍼 존에서 버티기로 하고 어슬렁거리지만 금세 지쳐 비싼 공항 숙소에서 반쪽짜리 일박한다.
잠 깨어나 남은 시간 버거워하며 들개마냥 헤맨다. 눈 따끔거리고 머릿속 흐릿하지만 하나 또렷한 건 방해받지 않는 자유에의 욕망. 한 걸음 뒤쳐지는 게으름을 방종으로 달랜다. 세계에서 모인 웬갖 잡넘 잡니욘 다 보인다. 이국땅 익명의 거리낌없음을 맘껏 즐긴다. 무어라 주절대고 욕을 내뱉든, 무얼 뒤적거리고 끼적거리건, 도무지 알아듣거나 신경 쓰일 바 없다.
카트만두
맨 먼저 우리를 맞은 건 먼지와 매연과 소음이었다.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상과 빛깔, 소리의 빛깔, 빛과 그림자의 빛깔.... 색이 있는 곳, 모든 게 색으로 표현되는, 빛이 없어도 색이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귀를 막으면 삼킬 듯 흘러가는, 오직 거대한 채색의 분류(奔流)를 본다.
여행에서 누리는 최초의 설렘은 트랩 내려 낯선 땅에 발 내딛는 순간 느끼는 오르가즘 같은 것이다. 달려드는 빛과 바람, 그리고 소음 속에서 꿈은 시작되었다.
산미겔 맥주 한잔에 여백의 시간 적시는 카트만두의 밤, 섣부른 여행자는 하염없이 탐닉하다 일정 망쳐버리기 십상인 바로 그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 Express Bus(?)로 포카라 향한다. 먼 북쪽 하늘 아래 신기루처럼 빛나는 설산이 떠오른다. 장엄이나 숭고 따윈 오히려 빈약한 수사다. 왜 신비가 생겨나며 신이 난무하고 인간들 하염없이 깊어지는지 어렴풋 알 듯도 하다.
버스는 중간중간 쉬고 식사도 하면서 일곱 시간을 달린다. 우리 옛 시골 닮은 그림 같은 들판들, 밭 전부 들꽃밭인가 하면 밭둑 모두 꽃길이다. 피곤한 눈 잠시도 쉬지 못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갠지스 상류인 듯 깊은 골짜기 강 따라 래프팅족들 보인다. 창 옆은 곧장 아찔한 낭떠러지인데 길옆에 드러누운 버스가 있다. 모두 긴장하여 입 다물지만 기사는 무심하고 버스는 질주한다. 앞에 앉은 여자는 아예 외면한다. 그러나 비행기 대신 버스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우나 험한 자연에 어우러져 있는 이들의 터전을 이렇듯 곁눈질이나마 할 수 있으니.
산에서 태어나 산에 살다 산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산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산은 곡식과 물과 짐승이 깃들 풀밭을 주고 빛 가리고 비 내려줄 구름까지 끌어다 준다. 구름은 산에서 생겨나 산을 흘러내려 사람의 땅을 덮는다. 골 아무리 깊고 물 맑아도, 태양 아무리 빛나도 여전히 구름은 산에서 생겨나 땅으로 흐른다.
포카라에서
'트윈픽스(twin peaks)'라는 이름의 한적한 숙소에 들었다. 이름 한번 가관이라 싶었는데 알고 보니 데이빗 린치의 영화가 아니라 아침이면 마주 보이는 마차푸차레봉을 두고 지은 이름이다. 문명의 더께를 느끼며 쓰게 웃는다.
뚱뚱한 여주인은 직업군인(영국 용병)이었다는 남편 자랑이 대단하다. 구르카나 셰르파족 네팔인들은 영국이나 싱가포르 군에 입대하는 걸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좋은 급여와 신분보장 따위가 매력인 듯한데 육칠십 년대 우리나라 사관학교 인기쯤 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지만 식민지나 군사 독재를 모르는 이들에겐 국적은 별 의미가 없고 군인은 매력적인 직업의 하나일 뿐이다.
시간 죽이러 페와 호수로 간다. 그리 맑지 않지만 바라보기만도 뭣해 보트를 빌렸다. 열 살 난 남자애가 보트를 젓는데 마냥 웃음 잃지 않는다. 노젓기를 거들기도 하며 시간만 흘리고 있는데 서양 할머니들 셋 탄 배가 접근한다. 짧은 영어로 수인사하고 지나치는데 미국 버지니안가 어디서 왔다는 그 할매들, 자꾸 말 건네더니 급기야 흥이 지나쳤는지 빨리 가기 내기를 청한다. 꼬마 선장, 승객도 한사람 적고 제법 노젓기도 거들어 줄 성싶은데다 꼬마라고 얕잡히기 싫은 호승심까지 곁들여 심드렁한 우리를 채근한다.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배도 많은데 속도를 내다가 다른 배와 부딪쳐 뒤집어지기라도 하면 구명의도 입지 않고 짐 줄이려 카트만두서부터 등산화 신고 온 터라 헤엄도 못 치고 물귀신 될 판이다. 배 타기 전 구명의 없냐고 물어보니 씨익 웃으며 ‘노 프라블럼’ 이라며 덧붙이는 얘기가 “해마다 빠져 죽는 사람 몇 있어요” 그 넘 참 사람 돌게 만드네...
어쨌든 내기가 되어 꼬마는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고 우리도 가세한다. 소리까지 지르는 할머니들은 무슨 난리도 아니다. 정신없이 질주하는데, 앗! 난데없이 나타난 한 척의 배가 앞을 가로막는다. 죽으라고 방향을 돌렸으나 그만 할머니들 배와 부딪친다. 우린 공포에 질려 노를 팽개치고 뱃전을 붙든 채 자세를 낮추었다. 상대 노잡이가 워낙 노련하여 피차 간신히 전복은 면했으나 할머니들 역시 사색이다. 꼬마 선장, 애는 애라 당황한 나머지 노를 놓고 빨개진 얼굴로 고개 숙인 채 우리를 힐끔거린다. 도로 녀석을 위로해야 할 판이다. 그래, 노 프라블럼이다! 민망해하는 녀석의 표정이 귀엽다.
호시절의 페와
저녁 먹으러 들린 한국 식당. 얼마만의 김치 맛인가. 첫 성찬이었다. 내일 이후 강행군에 대비한 체력보강인 셈이다. 간단히 맥주 곁들이는데 누가 우리말을 걸어온다. 인도를 거쳐 안나푸르나 트래킹 나선 학생인데 처음 만난 한국인이라 반가움이 크다. 코스 안내를 부탁하기에 동행한 가이드(셰르파족 젊은이)를 통해 알려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군 입대를 앞두고 모아둔 돈 들고 나섰는데 부모가 비상금으로만 지니고 꼭 되가지고 오라며 이십 만원 주시더란 대목에선 그가 더욱 기특해졌다. 아마 그 돈 되가져 드리거나 일부 헐어 조촐한 선물을 준비하지 않을까. 흐뭇한 저녁이었다.
산으로...
일찍 일어나 택시를 달린다. 기사는 마냥 쾌활한 친구다. 차창 너머 함께 달리는 경치에 넋 잃고 있는데 느닷없이 급정거한다. 놀라 내다보니 옆에 차가 한대 서 있고 두 운전자는 시끄럽게 웃으며 무어라 떠든다. 우리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더니 악수를 나누고 다시 달린다. 친구라도 만난 거냐 물었더니 웬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네? 더 기막힌 건 우리 차가 무리하게 추월하려다 부딪칠 뻔한 차의 운전자와 그 희희낙락이었단다. 저들의 낙천은 어디까지일까, 아연해진다.
그럭저럭 택시는 씩씩하게 고갯길 올라 산행 출발지인 나야풀이란 곳에 도착한다. 한창때 체력은 못되는지라, 가이드와 포터까지 우리 일행은 넷. 친구와 나는 옷가지 등을 담은 배낭을 메고 가이드 앙리마는 자신의 짐을, 포터 점바리는 침낭과 먹을거리 약간을 챙겼다.
출발! 자못 비장하다. 체크 포인트 들러 트레킹 허가 받고, 두 시간여 걷기 좋은 길 이어진다. 눈은 즐겁고 발걸음도 가볍다. 혈기 넘치는 덩치 큰 젊은이들이 집채만한 배낭을 메고 걷는 걸 보니 나이도 잊고 멋쩍은 기분이다. 아무리 인건비가 싸지만 괜히 포터를 고용했나... 그 기분도 잠시, 삼십도 넘을 듯한 가파른 경사를 한 시간쯤 치고 오르니 아무 생각이 없다. 지리산 중산리 길보다 더하구먼. 그러나 눈은 즐겁다.
첫 마을에서 올라온 길 굽어본다. 가냘픈 아가씨가 빈손으로 대나무 지팡이 하나에 매달려 숨이 턱에 차도록 걸어 오르고 있다. 아까 앞질렀던 여자다. 혼자는 아닐 테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기 오자고 해 놓고 앞서 가버린 동행을 욕하고 있지나 않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의 등 너머 계곡이 아득하다. 그림 같다. 그도 그림이 된다. 사진으로 담고 싶지만 조그만 자동카메라는 배경을 잡아내지 못한다.
간단히 요기하고 비탈길 빠른 걸음으로 내려선다. 기막힌 건 이 네팔인들, 우리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앙리마는 트레킹화를 신었지만 점바리는 바닥이 다 닳아 반질반질한 운동화다. 이 친구 집이 고도 삼천이 넘는 곳이랬던가.
이런 저런 생각에 정신없이 내려서니 저만치 개천이 보이고 그 너머 조그만 마을이다. 잠시 머물며 가져간 라면 끓여 밥 말아먹으니 꿀맛이다. 금강도 식후경이라, 경치도 한결 눈에 든다. 꼭 고향마을 같다. 꽃피는 봄날, 대청마루에 까치발로 서면 앞산 비탈은 한바탕 복사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고 아지랑이 따라 밭 속으로 들면 하늘은 온통 바알간 눈부신 오후였었다...
건너온 냇가 원두막 비슷한 옆에서 노인이 무언가를 열심히 매만지고 있다. 이 철에 무슨 농사일 준비하는 걸까? 이웃사람이 지나가다 우릴 보고 한참 기웃거리기도 하고 주인과 무어라 얘기 주고받으며 고개 끄덕이기도 한다. 다시 산 오르고 물 건너 도착한 곳은 첫 숙박지인 간드룽.
간드룩 마을에서
시간 가늠키 힘든 고도 1950미터의 산마을. 음식재료 빻는 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닭 우는 소리. 이 동네는 닭이 참 많기도 하네. 한 여인이 몽당빗자루로 먼지 하나 없는 마당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직사각형 돌 조각들로 덮인 마당이다. 만만찮은 연륜 잠긴 듯한 돌 하나하나는 저마다 무늬도 다르다.
먼 산 바라며 나지막한 돌담에 앉았다. 옆에는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웅크리고 앉아 먼 곳을 본다. 구름 붉으니 해가 지려는가. 지형 따라 등고선처럼 둑을 지은 밭들과 그 중턱이나 칠 부 능선쯤 올라앉은 마을이 보인다. 보성 차밭이나 피아골 논을 수십 배쯤 확대해 놓은 계단식 논밭들. 이 곳 사람들은 척박한 저 다락 논밭을 일구며 수천 년을 살아왔다. 생긴 그대로의 자연에 머물고자 모든 땀과 세월을 바치면서.
비는 하늘에서 내려 윗밭을 적시고 졸졸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린다. 물은 계곡에 이르러 내가 되고 강이 되어 성스런 강가(갠지스)로 흘러든다. 바다에 이른 물은 구름으로 올랐다가 이 땅에 다시 내린다. 윤회하는 물....
밭들 사이 점점 박힌 집들, 해 지면 하나둘 불이 켜지겠지. 아래 마을을 굽어본다. 산 중턱 비탈을 깎아 지어 올린 터 좁은 집들이라 같은 평면의 집은 몇 되지 않는다. 바로 아랫집 마당에는 서양인 가족 한 무리 카드를 즐기고 더 아래쪽에는 하릴없는 동네 꼬마 서넛 공기놀이에 골몰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쉼 없이 무어라 조잘대고 깔깔거리는 소리.... 여기서는 소음도 자연이 된다. 오래, 아주 오래 전부터 이네들은 자연의 온갖 소리와 함께 살아 왔다. 눈빛조차 자연이 되었고 그들의 몸짓과 소리조차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 중 누군가 스스로 자연과 차별화된 존재임을 느낀다면 산을 등지고 인간의 도시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
계곡 너머 마을이 보인다. 가깝고도 먼 마을. 갠지스까지 이르는 물길이 두 마을을 나눈다. 이웃 마을 한번 가려면 산 하나 오르내리고 물 하나 건너야 하는 이들이다. 건너 마을에 하나둘 불이 켜진다. 저기도 한번 들르게 될까...?
옆의 사내는 콧노래 흥얼거리고 다른 사내는 낮게 휘파람을 분다. 싫지 않다, 여기의 모든 것들이... 사내의 노래는 끝이 없다. 단조롭게 반복하며 끊어질듯 이어진다. 왼쪽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은 소녀가 보인다. 사내의 노래를 듣고 있을까? 혹 엄마의 꾸중에 상한 속을 혼자 달래고 있을까.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소주 한잔에,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칸막이 방에서 판자문 살짝 밀치면 틈으로 섞여드는 가랑비 소리에 취해 버렸다. 멀리서 낮게 울려오는 북소리 피리소리... 어디 흥겨운 놀이판이라도 벌어졌나부다. 끝도 없이 떠드는 할머니들의 목소리, 호수에서의 그들일까? 장하게도 올라오셨네. 잠도 없으신가, 여덟시가 넘은 이 깊은(?) 밤. 얻어온 촛불 하나는 수명을 다해 간다. 소주 한잔 뒤로하고 판자문 밀치고 나선다.
아, 어릴 적 바로 그것, 구름 너머 빛살도 달 기운도 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 반가웠다. 얼마 만인가, 손 내밀면 까맣게 온몸 적셔오는 이렇듯 온전한 어둠에 서 보는 것이. 어둠은 나를 품은 채 깊고 그윽하게 출렁이며 흐른다. 어둠은 무명(無明)이 아니다. 무명을 넘어 지구와 태양을 넘어 먼 별로 이어지는 무한의 얼굴 같은 것이다. 멀어졌다 끊어졌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설산 가까운 곳, 왜 여기를 피안의 언저리로 여기는지 알 것도 같다, 몽롱한 취기 속에서. 내일 새벽이면 영원은 다시 희디흰 자태로 하늘 가운데 솟아 있으리라.
촘롱 가는 길
복숭아꽃 있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라는 구절이 느닷없이 떠올랐던 건 킴롱 마을 아래 계곡 굽어보는 길가 나지막한 바위에 앉아서였다. 사람 사는 그 곳, 무얼 보았냐고 물으면 그들이 살고 있더란 밖에.
아지랑이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길 이쪽 자락은 고운 새소리와 이국말 수런거림에 젖어 있고, 훌쩍 자란 밀밭 너머에는 한두 채 인가 낯설지 않게 웅크리고 있다. 하염없는 물소리, 참으로 오래된 소리... 물가에는 이름 모를 붉은 꽃 피었다 지고 그렇게 오랜 세월 이들은 살아 왔다.
킴롱 가는 길에 보았던 말똥 줍는 소녀. 땟국 절은 손으로 말똥을 집어 제 나이만큼 묵었을 소쿠리에 담으면서도 호기심 감추지 못한 커다란 눈망울은 줄곧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흰자위 유난히 깨끗하고 맑던 눈에 웃는 모습 동자부처처럼 귀여웠다. 알고 싶은만큼 부끄럼 많을 나이, 얼굴 까만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손과 눈빛 쉬 잊혀지지 않는다.
능선길 따라 돌며 건너보는 촘롱 마을. 하늘은 구름으로 산과 맞닿아 있고 사람의 마을은 산으로 산으로 흘러 구름으로 든다. 구름 속을 걸어 우리는 촘롱마을에 들었다.
구비치는 줄무늬 계단 논밭들 사이로 점점 집들은 수직 단애(斷崖) 허공에 걸린 곳. 지극한 심미는 죽음을 유혹하고 숨 막히는 풍광에 가위눌린다. 감당할 수 없는 욕구란 치명적 본능이다. 꿈처럼 스며드는 숨죽인 죽음에의 동경은 차라리 탐욕이다. 점입가경으로 달려드는 바람은 구름을 헤집으며 산을 맴돈다. 그냥 잠들고 싶다. 영원히 남아있을 저 산과 구름과 눈망울 빛내며 염소떼 몰고 구름 속 가는 어린 소년 뒤로한 채...
속수무책 깊어지는 골짜기와 이름 없는 산들, 무명(無名)의 아름다움. 온갖 찬미와 시선 받아내며 거기 그대로 삭고 삭은 시간처럼 의연하다. 산에 내린 안개인지 구름인지 아래로 아래로 짙어질수록 산은 점점 멀리 가고 실없는 나만 자꾸 허연 그 속으로 다가선다.
흐린 빛 두어 줌 겨우 드는 창, 그나마 커튼 반쯤 바람 든 촌년 치맛자락처럼 걷어붙여 놓고.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이지. 대충 빨아 널어놓은 팬티 두 장 티셔츠 양말 두어 켤레 사이, 언뜻언뜻 비치는 이름 모를 산의 처녀 속살보다 고운 희디흰 살결과 코앞에 꾸불꾸불 늘어지는 거친 글자까지도... 그 중간쯤 창틀에 걸린 빨지 않고 말려 냄새나는 양말까지도.
산이야 오르다 지치면 저 혼자 구름으로 숨으면 그만이고 내사 고치처럼 몸말아 곱은 손 비비며 침낭에 웅크리면 그만이지만 저 놈의 빨래, 오갈 데 없이 볕살 하나 없이 어쩌자는 것인지 전들 난들 알 수가 없네. 도무지 이 놈으 산촌에는 하늘바라기로 대책 없이 기다리거나 그도 지치면 배 째라 자빠지거나 둘 중 하나일 터인데 참으로 빨래란 것들, 나그네들 대책 없이 퍼질러 널어놓은 저것들, 참으로 어쩌란 말인지....
넉넉한 오후시간, 마당 탁자에 둘러앉아 값싼 맥주 한잔으로 한껏 기분을 낸다. 안주는 칼몬드랑 오징어 그리고 주인이 서비스한 물소 육포까지 제법 푸짐하다. 앙리마 녀석은 놀랍게 오징어 광이다. 아까부터 건너편에 앉아있던 덩치 큰 아가씨 셋이 싱글거리며 기웃거린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 날아온다. 혀 짧은 영어로 받아넘기고 서로 호적조사 끝내니 한두 마디씩 가속 붙는다. 독일 라이프니츠에서 온 약대생이다. 한 아가씨가 칼몬드 속 멸치에 관심을 보인다. 몇 마리 건네주니 조심스레 맛 보더니, 입맛은 용해 가지고! 더 달래네? 아예 반을 넘겨주니 입이 찢어질 듯 고마워한다. 서양인들은 평소 멸치를 안 먹는 모양이네? 쟤들 귀국하면 북해 멸치 씨가 마르지 않을까, 멸치 맛은 말리는 요령도 중요하다던데... 웃고 떠드는 사이 또 하루가 저문다.
고개 넘어 도반으로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언제 그랬더냐는 듯 쾌청이다. 안나푸르나 남봉을 위시한 준봉들이 줄지어 눈부시게 펼쳐진다. 산이 크고 높아서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가깝다. 눈 덮인 절벽이며 골짜기 주름살 하나하나까지 깨끗이 드러난다. 당당한 봉우리는 눈보라 날리며 아침햇살 속으로 첫 구름 피워 올린다. 잠시 압도된 채 서 있다. 원기 왕성하다. 오늘은 제법 강행하자.
돌아보는 경치가 멋진 시누와. 이 고개 넘으면 마을은 없다. 등 뒤로 떠나온 촘롱 마을이 아득한 절벽 위 그림처럼 걸리면 우리는 고개 넘어 저 깊은 산의 속살을 훔쳐보러 나아간다. 신비롭게 솟던 마차푸차레는 차츰 옆으로 비켜가고 바쁜 발길은 정글로 빠져든다. 머리끝까지 이끼를 뒤집어쓴 나무들과 끝없이 이어진 대숲도 지나고, 연옥 가는 길인 양 하늘도 없이 골짜기 향해 아래로만 이어지는 계단길도 지나 우리는 간다. 대기는 축축하고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끝 모를 어둠의 심연 찾아드는 느낌이다.
홀연히 막아서는 천 길 절벽! 수십 갈래 물줄기가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벽 전체가 폭포다. 들었던 카메라를 도로 내려놓는다. 광각렌즈인들 폭과 높이를 제대로 담아낼까? 표지판이 있다. Beautiful but Dangerous! 옳거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또한 그 때문에 치명적인 것을. 표지 세운 이의 무심하면서 탁월한 감각에 새삼 감탄한다. 산은 깊어지고 걷는 길 끝없이 이어진다.
처음으로 만난 눈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도반(Dovan). 마을이라기보다 트래킹족 위한 숙소촌이다. 배낭 벗기 무섭게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이 시기 오후 세 시 이후면 늘 그렇단다.
고개 들어 산을 본다. 그냥 솟아올라버린, 하늘이 우습다는 듯 수직으로 솟아버린 산. 그 직벽 한가운데 골짜기에 꼭 여성의 은밀한 부분처럼 생긴 곳이 있다. 쏟아지는 빗물을 받아 흘러내리며 길쭉 둥그스름하니 하얗게 빛난다. 히말라야도 이쯤 깊이에선 한 속을 드러내 보여주는 걸까? 싫지 않다. 홀로 은밀한 즐거움에 한참을 보고 있었다. 비는 숫제 우박이 된다. 내리꽂히듯 떨어지는 낙수(落水)는 휘날림도 없이 한층 곧다. 독일인인 듯 한 중년 사내도 우두커니 넋 놓고 바라본다. 비와 비안개 속에서 명멸하는 산의 윤곽들...
오래 잊고 산 것들이 있다. 아니, 살아오면서 잊어버린 것들이다. 소리들과 어둠과 그것이 빚어내는 것들과 덮고 감추는 것들. 참 오랜만에 바람을 보고 소리를 듣고 어둠을 느낀다. 오래되었으나 결코 낡지 않는 것들...
식당 난롯가에 앉아 부랄이 노골노골해지도록 굽는다. 앙리마는 우리끼리 시시덕거리는 그 표현이 궁금하다. 이 친구는 한국 원정대 가이드 경험으로 우리말을 제법 하는데 뜻 모를 말이 나오니 학구열이 발동한다. 자상하게 일러 주니 함께 키득거린다. 절대로 여자한텐 쓰지 말란 주의에 더 킬킬거린다.
함석지붕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빗소리... 왠지 후련해진다. 따뜻한 차 한잔과 발 덥혀주는 난로. 푸근한 행복감에 젖는다.
안면 있는 말만한 여자 셋이 들어선다. 어제 촘롱에서 만난 멸치 좋아하던 아가씨들이다. 날은 저물고 쏟아지는 빗속에 길 끊기니 오늘 예서 다시 만난다. 운동선수급 체격에 착 붙는 등산복을 입어 드러나는 몸매는 다리통 하나가 거의 어린애 허리다. 거기 고글까지 걸치니 보는 내가 지레 주눅 든다.
식당은 바야흐로 국제적 수다 한마당이 펼쳐진다. 독일인 셋, 미국 청년 셋, 일본인 하나, 기타 다국적 트레커들, 현지인 몇 그리고 우리들. 십수 명 둘러앉은 커다란 사각 탁자에는 독서삼매 빠진 뇬, 심심파적 카드놀이 하는 넘들, 코 맞대고 속삭이는 치들, 무언가 열심히 끄적이는 친구, 초저녁부터 술판 벌인 패, 나름대로 바쁘다. 오늘 하루 술 안마시기로 작정하니 심심파적 생각한 게 둘러앉은 이들 별명 짓기다. 한동안 우리끼리 배 잡지만 그도 잠시 또다시 무료한 시간...
책을 뒤적인다. 방으로 가봐야 춥고 깜깜할 뿐. 분위기는 무르익어 간다. 남포등은 쉭쉭 소리 뿜으며 낮게 걸려 있고 빗줄기는 쉼 없이 지붕을 두드린다.
깊어 가는 안나푸르나 밤 식당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 탁자 아래는 건장한 남자 둘쯤 들어가 누워도 될만큼 널찍이 패여 있고 그 가운데 석유스토브가 씩씩하게 열기를 내뿜는다. 열기를 잡아두려 탁자 가장자리는 두툼한 천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천 쳐들고 무릎을 집어넣으면 기분이 참 묘해서, 첨에는 꼭 어릴 적 여자애들 치마 들치던 느낌이지만 따뜻하기는 그지없다. 천 안쪽에는 빨래줄 용도로 철사가 빙 둘러쳐져 있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어제 못다 말린 빨래 말리려고 팬티랑 양말을 빈 옆자리까지 걸쳐놓았다. 그런데 독일 여대생이 내 옆에 앉아 난로를 쬐며 다리를 꼬는 바람에 해골무늬 팬티 하나 탁자 아래 떨어져 버렸다. 민망하게스리... '쏘리~' 연발하며 미안해하는 그녀를 세워두고 아래로 기어 들어가 빨래를 줏어 다시 널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내 팬티도 더 이상 수난을 겪지 않았을 텐데, 불행은 이어 오는 법. 독일 친구들 가고 그 자리에 '미장원 고양이'라 별명 붙인 새침한 미국 아가씨가 앉는다. 한참 후 다 말랐겠다 싶어 짧은 영어로 '내 빨래'라고 손짓까지 거들며 그녀 무릎 위 천을 들치는데, 이런 낭패가...! 빨래 몇이 보이질 않는다. 머피의 법칙이라던가? 뭇사람 아랫도리만 즐비한 발내 나고 찝찝한 거길 다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악몽처럼 되풀이된다. 결국 그 음침한 공간에서 쥐벼룩을 옮아 며칠 고생했고 팬티 한 장은 미국 고양이(?) 발자국 무늬 덧붙인 채 입어야만 했다....
눈 속으로
체력은 떨어져 가는데 풍광은 갈수록 비경이다. 점심차 머무른 데오랄리. 눈 덮인 설산 위로 구름 흐른다. 옆에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까지 가기를 포기하고 일행 기다린다는 일본 아주머니 한 분 앉았다. 표정이 더없이 평화롭다.
뜨거운 레몬차 한잔 놓고 창밖을 본다. 세상에서 우리가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싫지 않은 소리들과 일용할 양식 조금과 지금 이 정도의 눈맛, 더 욕심낸다면 가끔씩 벗할 몸의 온기....
쏟아지는 눈을 헤치며 말없이 나아간다. 덤불숲과 눈 덮인 계곡을 지나 흰 설원 하염없이 걷고 있는 그림자들... 사람의 행렬조차 움직이는 정물이 되고 눈발에 갇힌 시야만큼이나 사람 세상은 뇌리에서 희미해져간다. 다리는 무거운데 몸은 점차 투명해진다. 한가로이 눈은 왜 내리느냐고 물을 겨를이 없다. 한 치 감상이나 꿈도 허용치 않을 영겁의 시공간.
갑자기 환영처럼 떠오르는 한줄기 빛, 눈의 폭포! 장엄미라 했던가? 에버란체(눈사태)란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무슨 소용이랴. 비가 오면 빗물 그대로 눈이 오면 눈 그대로 쏟아 내린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단순하고 명료하다. 백색의 천지간, 바람이 관목 숲으로 들면 문득 산수화 한 폭! 탐욕스런 카메라는 찰나를 헤집으며 작렬한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난로 옆 길게 누워 잠든 사내가 있다. 그의 꿈속엔 무엇이 있을까? 온통 하이얀 산일까, 고단한 짐꾼의 일상사일까? 아내와 딸과 그들과 나누는 나날의 걱정거리들. 우리 잠 속의 꿈은 늘 그런 것일까? 눈빛으로 뒤덮인 그런 순결한 꿈은 없을까? 잠자리가 편치 않은지 폭 이십 센티 남짓한 판자 위에서 몸을 뒤척인다. 그것이 인간이 쉬고 꿈꿀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럴까, 그게 전부일까?
김 서린 유리창은 바깥 풍경을 한결 스산하게 만들고 쉼 없이 타오르는 난로 불길 소리는 사람의 공간을 더욱 따뜻하고 슬프게 한다.
고도 삼천 넘어서부터 약간 머리가 띵하더니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가까워지며 다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고산증이란 건가. 달-밧이라는 엄청 양 많은 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포만감 가누지 못해 밖으로 나온다.
들이붓듯 쏟아지는 눈을 본다. 명멸하는 순백의 결정(結晶)들. 여기 내리는 눈은 함박눈이 아니다. 굵은 소금보다 훨씬 큰 정육면체로 손바닥 펴고 받으면 금세 수북 쌓인다. 그 한 알 한 알 당당한 무게가 영겁을 쌓아 오늘의 이 만년설을 만들어 왔다. 무어라 할까, 사물의 이름이란 그저 자유를 빙자한 우리 인식의 감옥일 뿐, 이름 없는 수많은 눈들과 산들... 세상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붕 두드리는 눈발 소리도 익숙해진다. 자연이 일상적으로 터하고 있는 인간의 일상.
내 존재의 근거를 자문한다. 두고 온 집, 사람의 공간을 생각한다. 광활한 눈길 지나오며 내가 있었던 많은 시간들을 아득히 건너보았다. 죽음은 멀지 않다고 느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홀연히 사라져 가는 산그림자처럼, 느끼는 모든 것은 순간과 영원이 무상(無常)으로 이어지는 그 곳에 있었다. 사는 일이란 그토록 어느 순간이든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희박한 공기(엄살!)와 야릇한 두통으로 담배를 피울까 말까 망설인다. 여태 구르카 전사 칼 그림 있는 네팔산 ‘고꾸리’ 담배를 피웠다. 박하향 연하게 배어 있지만 그리 거북하지 않고 값도 싸서 며칠째 애용했다. 내일까지만 금연할까?
독일 아가씨들이 보이지 않는다. 점심 먹었던 곳에서 묵는 모양인데 고도적응 위해선 그게 현명한 처신이겠다. 안보이니 그립네... 이틀 동안 그들과 비슷한 보조로 움직였다. 구동독 출신이라 그런지 미국이나 타 유럽인들이 보이는 뺀질함이 없고 꽤나 소탈한 듯했다.
그에 비하면 몇 미국인은 오만에 가까운 수다로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제법 나이 들었으면서도 좌중을 휘어잡을 듯 목청 큰 이도 있었다. 세계 경찰 국가 국민다운 오만인지...
가장 점유율 높은 부류는 이스라엘인들인데 긴 군복무 마치고 온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제대후 심정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새벽 도주까지 일삼는 둥 영 싸가지가 없다며 네팔인들의 혐오 일순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 이들 역시 시끄러운 음악을 안하무인으로 틀어대거나 식당 자리조차 나누어 앉을 줄 몰랐다. 그러나 역시 사람 나름, 하산 길에 잠시 얘기 나누었던 한 이스라엘 청년은 눈매만큼이나 무척 속 깊은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인을 어떻게 보아 왔는지 로지 주인에게 묻는다. 호의적인 여러 말에도 불구, 단 한마디가 나를 머쓱케 한다. 'only climbing!'
정상 공략에 매진하는 등반대의 일사불란한 행군 대열과 산정에 서서 썰렁한 브이 자 그리며 세르파와 함께 태극기 부여잡고 있는 그림 떠올리며 쓰게 웃는다. 쫓기는 듯한 조급증. 스스로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도 없이 산업적 근대화에 골몰하며 달려온, 여전히 변함없는 우리 이야기다. 성장 신화에 길들여진 우리 모습이 이들의 눈에는 민족성인 양 여겨지겠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버릴 것 하나 없는 아름다운 산하를 주마간산 지나쳐 꼭대기 향하는 것까지는 취향의 문제라 하겠지만, 정복이니 공략이니 전투 용어와 나라 이름 손가락 꼽아가며 등수 매기는 데 이르면 유치함이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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