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과 여행/해외

캐나다 2

by 숲길로 2007. 6. 4.

힐리 패스 파노라마(클릭!) - 오른쪽 눈덮인 곳이 모나크봉과 성벽 능선

 

* 나흘째, 요호 공원 일대

 

시차적응이 느리다. 그런 적이 없었는데... 새벽안개 피는 호수가 보고 싶어 일찌감치 일어나 혼자 차를 몰아 레이크루이스로 향한다. 그러나 이 차디찬 빙하호는 안개가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다소 실망스러웠다. 다만 붐비지 않는 레이크루이스를 차분히 바라보는 느낌만은 각별하다. 다시 모레인 호수로 달린다. 눈 덮인 열 봉우리에 둘러싸인 새벽 호수는 적막했다. 호반을 따라 걷는다. 반바지를 입은 아랫도리가 후들거리도록 바람이 차다. 서둘러 돌아오는 길, 멀리 강변 침엽수림 위로 자욱이 안개가 내린다.   


일행 대부분이 편한 코스를 원하고 나 역시 몸 시원찮다. 요호 지역의 에메랄드 호수와 타카카우 폭포로 가기로 했다. 뭐, 언제든 한 번 가 봐야 할 곳 아닌가벼.

요호 가는 길, 도로는 쭉쭉빵빵으로 뻗는다. 하이웨이조차 갓길 겸 자전거 도로가 널찍하다. 힘차게 페달 밟으며 바람맞고 달리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고기를 주로 먹으니 그런가, 힘이 얼마나 좋은지 조그만 자전거에 짐까지 엄청 매달았다. 대책 없이 세월아 네월아, 인라인 밀고 가는 청춘도 있다. 저러다 지치면 디따 길가에 퍼질러 앉아 히치하이킹 하겠지...? 사는 맛이 참 자연스럽고 그럴 듯하다.


에메랄드 호수는 평화로웠다. 워낙 넓고 완만한 상류의 배후지를 흘러온 빙하수는 빙퇴석 가라앉히고 호수까지 다다른 물은 더없이 맑고 차다. 호수 왼쪽 끼고 도는 산책길, 틈틈 호수를 바라보며 재게 발 놀린다. 호수 끝나는 삼거리에서 분지 쪽으로 향한다. 에메랄드 분지는 이정표 있는 삼거리에서 불과 2.3km. 조금만 가면 습기 머금은 울창 숲이다. 오른쪽은 호수 상류 깊은 계곡이 언뜻언뜻 보이며 전망 트이나, 왼쪽은 한동안 아름드리 나무만 우거진 깊은 숲이다. 혼자 걸으니 괜히 예민해져 사소한 소리에도 걸음이 느려지고 고개 돌아간다. 얼마를 갔을까? 나이 지긋한 부부가 환한 웃음 지으며 인사 건넨다. 마주 웃으며 지나친다. 오르막 끝나고 키 큰 들꽃 듬성듬성한 길을 따라 걷다보니 문득 시야 열린다.

멀리 병풍처럼 둥글게 하늘 막아선 바위 절벽과 그 아래 넓게 펼쳐진 분지가 한 눈에 든다. 절벽 왼쪽 구석 휘청이며 흘러내리는 폭포 한 줄기,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맞닿은 곳에 스스로 풍화하며 침묵만 키워 가는 만년의 눈더미들. 분지는 자궁처럼 둥글고 아늑하다. 분지 일부는 그닥 실하지 않은 느린 비탈 숲이고 나머지는 햇살에 빛나는 바위와 자갈 벌판이다. 폭포 내린 물은 분지 오른쪽을 크게 감돌아 흐른다. 분지 막다른 곳 가까워지며 길은 두 갈래다. 비탈 숲 가장자리로 이어져 폭포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십 미터쯤 갔을까? 느닷없이 숲 속에서 큰 개 짖는 듯한 울부짖음 소리! 절벽을 흔들듯 질리도록 큰 울림에 걸음 멈춰버린다. 조심스레 살펴보지만 숲 속이라 보이지 않는다. 그리 가깝진 않은데...? 다시 몇 발자국 내디딘다. 또다시 울부짖으며 으르렁대는 소리... 분지를 둘러싼 절벽에 메아리친다. 마치 나를 노려보며 오지 말라 경고하는 듯하다. 이런, 가깝지 않은 게 아니다! 돌아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동행이 한 사람만 있어도 계속 가 보련만... 걸음 빠른 함선생이 왜 아직 안 오시지? 막막하다. 갈 길 유심히 살핀다. 흘러내린 빙하 더미를 타고 폭포 아래 이르면 왼쪽 개울로 이어지는 길이 있겠군, 기껏 이십분이면 한바퀴 돌아올 거리인데. 그러나 저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으며 혼자 발걸음 옮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무모해지지 말자, 돌아서 다른 길로 가자... 갈림길로 돌아와 빙하수 흐르는 개울가 아랫길로 접어든다. 급류 소리에 묻혔는지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작은 바위들과 자갈 사이로 길이 차츰 흐려지며 사라진다.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는다. 사방 온통 땅바닥에 달라붙듯 모질게 뿌리내린 이름 모를 하얀 들꽃들, 짧은 목 곧추세워 저마다의 하늘을 꿈꾸며 피어나는 얼굴들. 에메랄드 분지에 앉아 에메랄드빛 하늘을 올려 본다. 구름 한 점 없다. 머릿속이 텅 비어온다. 시간은 순수한 균질로 흐르거나 정지한다. 내 맥박과 호흡이 느껴지고 골짜기 물소리, 이름 모를 들꽃과 바위들은 천천히 한 하늘 속으로 선회해 들어간다. 어떤 배반이나 균열도 없는 그러나 위험천만한 무의지의 세계. 생사(生死)의 꿈도 흐름의 가장자리 따라 경계 지우며 느릿느릿 밀려들어온다...

십여분 쯤 지났을까. 멀리 함선생 모습이 보인다. 에구, 반가워라. 호수 끝 삼거리서 길이 헷갈려 머뭇거리는 사이 나를 시야에서 놓쳐버렸단다. 또 혼자 걸어오기가 영 마뜩찮더란 건데, 곳곳에 곰 타령 적힌 낯선 나라 음습한 적막 산길 혼자 걷는 기분이 영 호젓하고 즐겁지만은 않더라는 말씀이다. 아까 들은 울음소리 얘길 했더니 숲 쪽을 유심히 살피며 아마 늑대가 아니었을까 하신다. 글쎄, 뭐였을까, 여하튼 그토록 질리는 짐승 울음소리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에메랄드호 


호숫가로 내려와 왔던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아, 저 들꽃들! 들꽃에게서 저렇듯 고고함을 엿보리라 누가 상상했을까. 폭발하듯 피어나 지천으로 무성한 꽃밭은 아니지만, 침묵하는 에메랄드호 위로 떠올라 오후 햇살 아래 한 송이 한 송이 색색으로 빛나는 그것들은 구름 없는 밤하늘 거니는 성좌처럼 아름다웠다. 호수 가장자리에 박힌 수많은 에메랄드들이었다. 정적의 한 때, 수면의 반짝임이 슬로우 모션으로 흔들리다 무한히 길어지는 호흡으로 멈추는 순간 들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길을 연다.

많은 이들이 설산 그림자 비치는 에메랄드호 풍경을 최고로 꼽지만, 나는 단연 저 풍경, 맑게 걸러진 빙하수 줄기가 숲을 지나 평탄한 모래습지로 갈래져 흘러들며 오후 햇살에 빛날 무렵, 평화로이 반짝이는 호수를 배경으로 빨강 노랑 파랑 하양의 들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한 순간을 꼽겠다.


호수를 돌아 입구 주차장 이르는 동안 허기가 온다. 부랴부랴 차를 몰아 도착한 필드. 햇살 좋은 키킹호스 강변에 앉아 드럽게 비싸고 맛없는 햄버거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다.  

필드는 요호공원의 거점 마을이다. 키킹호스 강변의 널찍한 모래밭까지 펼쳐내며 이름 그대로 산기슭 벌판에 시원스레 자리한 동네다. 화이트워터급 래프팅이 가능한 급류의 키킹호스 강이 폭을 넓히며 다소 흐름이 느려지는 곳인데도 넓은 백사장과 물거품 이는 강물의 경계는 칼로 자른 듯 단호하다. 단숨에 바다에서 치솟아 올랐으리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로키의 강다운 모습이다. 적당히 융화하고 타협하며 어울리는 태도와는 애초 담을 쌓았다. 여기에서 저기로 곧바로 치달리며,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그런 완강과 불굴의 기세로 바윗덩이 자체로 우뚝해버린 저 로키의 산, 산들...


타카카우(takakaw) 폭포 가는 길은 제법 커브길 오르막이다. 어쭈, 한 고개 하는데? 핸들 잡은 매형은 이제야 운전다운 운전을 해 본다며 즐겁다. 좌우로 펼쳐지는 요호밸리 모습은 밴프 지역과 또 다른 맛이다. 무턱대고 치솟은 돌덩이의 기암절벽과 뾰족산이 아니다. 크고 밋밋하게 솟은 고원을 수직으로 잘라 낸 절벽과 그 아래 울창하게 자란 침엽수림 사이를 파고드는 꼬불길 드라이브가 일품이다. 강 따라 들 따라 내쳐 뻗은 여느 도로와 달리 꽤 깊이 계곡을 따라 도로가 놓인 것은 명성 자자한 타카카우 폭포와 일대의 여러 하이킹 트레일 때문일 것이다. 요호 지역 트레일은 밴프지역과 달리 대륙분수령(great devide) 서편 경관을 제대로 감상하기에 좋다고 한다. 몇 군데 기대는 가졌지만 그 어느 곳에도 갈 수 없었음이 못내 아쉽다.

 

타카카우 폭포 


원주민 말로 ‘장대하다(magnificent)’는 뜻의 타카카우는 이름 값하듯 당당하고 기백 넘친다. 이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에 수량도 풍부하다. 위가 보이지 않아 눈짐작만 아쉬운 드넓은 고원의 빙하 녹아내린 엄청난 양의 물이 타카카우에 이르면 삼사백 미터 낙차로 굉음과 함께 거침없이 쏟아진다. 물은 곧바로 강을 이루며 요호 밸리를 굽이쳐 흘러간다. 직각으로 고개 꺾어야 폭포가 제대로 보이는 지점까지 파고드니 덮치듯 밀려오는 물보라와 세찬 바람이 섬뜩하다. 도무지 한 점 거침없이, 난폭에 이르는 저 당당함. 물길이 폭포로 들어서며 한번 세차게 튕겨 솟구치기에 물줄기는 뭉치지 않고 펼쳐져 휘날리며 내린다. 바로 아래서 보고 있으면 폭포수가 머리위로 곧장 떨어지는 착각이 든다. 보는 거리에 따라 물보라의 느낌도 다르다. 폭포 턱밑까지 파고들어 어지럼 참으며 한참동안 물보라와 바람을 맞는다.

나중에 조카가 물었다. “삼촌, 거기까지 왜 갔어요?” 물보라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고 했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나도 모른다. 다만, 폭포 한가운데 선다면 순식간에 몸이 박살나버릴 거란 상상이 머리를 스치며, 찰나에 가루가 되어 물보라로 흩날리는 황홀한 전율이 번개처럼 몸을 뚫고 지나갔을 뿐.


처음으로 여유 있는 오후 시간. 그러나 며칠째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무척 노곤하여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죽은 듯 뻗어버렸다. 조카는 친구와 함께 우리들 몫까지 챙겨 빨래방 가고.

정신없이 두 시간쯤 자고나니 좀 낫다. 저녁은 야외 바비큐 식당에서 하잔다. 숙소 마당에 있는 그 식당은 밖에선 그럴듯해 보였으나 순 엉터리다. 레이크루이스의 바가지 물가를 다시 실감한다. 부실한 안주에 술만 축냈다.


* 닷새째, 힐리 패스 넘어서 길을 잃다

 

오늘 예정지는 모레인호에서 시작하는 에펠 호수 트레일, 지도에는 곰 출몰에 따른 통행제한 여부를 반드시 미리 확인하라는 곳이다. 함선생과 나는 더 먼 웬첸마 패스까지 내지르기로 살짝 묵계해 두었다.

아침에 빌리지 입구 마운틴 식당에 들렀다. 한인이 경영하는데 가격 대비 품질이 레이크루이스답지 않게 좋다. 그래서 손님이 꽤 많다. 우리가 한국인이란 걸 아신 사장님이 손수 주문을 받으러 와선 주문은 잊어버리고 하이킹에 관한 정보를 잔뜩 주신다. 어제 아침에도 들렀는데 일본인인 줄 아셨대나. 하긴 샤토 레이크루이스 호텔이 속한 CP계열이 일본 자본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 밴프 이상으로 레이크루이스는 일본인들 텃밭이다.

결국 사장님이 추천한 힐리 패스로 코스를 바꾸었다. 패스(고개)라기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아주 편한 길이란다. 지도를 보니 밴프에서 가보고 싶었던 선샤인 매도우 바로 옆이다. 잘 됐다. 무엇보다 들꽃 천지라니. 든든하게 배 채우고 사장님의 배려로 메뉴에도 없는 샌드위치까지 특별 주문해 길을 나선다.

 

선샤인 크릭  


스키장 있는 선샤인 빌리지. 제 철이 아니라 휑하니 바람만 둘러보고 지나가는 공터 너머 길은 시작한다. 힐리 크릭 거슬러 오르는 가파르지 않은 숲길, 사이사이 들꽃밭이 나타나며 단조로워지는 풍경을 기분 좋게 흔들어 놓는다. 쾌적하게 이어지던 숲길 끝나는가 싶더니, 문득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들꽃 벌판! 세상에, 이런 데가 있다니...

걸음 떨어지지 않아 자꾸 멈칫거린다. 그러나 그건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구비 돌아 이어지는 길 오를수록 광활한 꽃밭은 시야의 끝을 자꾸 밀어낸다. 주능선 달려오는 고갯마루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꽃밭은 지평선 이루며 하늘에 닿는다. 하늘 가장자리에 피는 꽃. 저마다 하나씩 수천수만 하늘을 물고 피어 있는 꽃, 꽃들... 분수령 주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일구어 놓은 수십만 평 벌판과 구릉이 온통 들꽃 천지, 소문 그대로 들꽃 천국(wildflower heaven)이다. 꽃밭 곳곳에는 아직도 눈 더미 성성한데...

이건 피어나는 게 아니라 터져나는 것이며 울려 퍼지는 것이다. 아무런 약속 없이 한 포기 한 포기 저마다의 몸에 심어진 점화 타이머를 말없이 운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수천수만의 꽃들을 동시에 터뜨리는가? 파랑, 하양, 빨강, 노랑... 활짝 벌어진 초롱 모양의 노란 꽃이 가장 많다. 멀리서는 거의 노랗게 보인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노란 꽃 지고 나면 보라 꽃, 뒤를 이어 빨간 꽃이 활짝 피어난단다. 다들 아예 입을 닫아버린다. 입 열면 벅찬 느낌이 어디론가 달아날 것만 같다.

들꽃은 가질 수 없는 이름이다. 사로잡는 언어로 오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머물며 아득히 흘러간다. 머무름과 흐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이름 이전의 꽃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의 존재 방식은 부재(不在)를 향한 열림이기도 하다.

 

힐리패스 들꽃밭 

 

무아경에 빠져 꿈길 거닐다 보니 어느 새 고갯마루에 올라서 있다. 대륙분수령 지나가는 고개지만 2300여m 고도의 완만한 능선이다. 전망 좋은 바위에 앉았다. 한 풍경을 마무리하며 불어오는 바람!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느리게 굽이치는 들꽃 초원과 부드러운 능선을 가로질러 흐른다. 사이사이 작은 백록담을 연상시키는 앙증맞은 고원 호수들. 여태 보아온 기골장대의 캐나다 로키가 품은 또 다른 모습이다. 고개 너머 멀지 않는 곳, 검푸른 물빛 담은 이집트 호수와 얼어붙은 히든 호수(?)도 보인다. 멀리 가파르게 솟아있는 봉우리와 검푸른 첩첩 능선들은 농담(濃淡)을 달리하며 아득히 하늘빛 닮아간다. 눈 덮인 삼각봉이 유난히 눈에 띄는 아시니보인산, 생김이 그래서 캐나다 로키의 마터호른이라던가.

 

 아시니보인산


힐리패스에서 왼쪽으로 이어진 눈 덮인 능선이 바위봉 만나는 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한다. 사오킬로쯤? 거침없이 수평으로 뻗은 절벽이 인상적이라 고개 오르며 눈 여겨 두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능선 이름은 모나크 성벽이고 끝에 솟은 산은 모나크봉이었다. 뒤 일행에 넘겨주고 온 지도를 떠올린다. 심슨 패스가 저기쯤일까. 그럼 저 끝까지 가면 다시 힐리크릭으로 내려갈 길이 있겠구나. 도착한지 삼십분, 도시락을 다 먹도록 일행이 보이질 않는다. 함선생도 능선 길을 탐내는 눈치다. 내가 슬쩍 심슨 패스를 돌아 내려가는 삼각코스를 상기시키자 아쉬운 눈길을 몇 번 던지더니 “가 봅시다, 까짓 거” 하며 자리를 차고 일어선다.

“그래도 지도는 받아 가야죠”

“그냥 가지요 뭐,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갈 길은 단순해 보였다. 실낱처럼 하얗게 뻗은 길의 윤곽도 조금 보인다. 능선 가장자리 절벽 쪽은 수 미터 두께로 눈 덮여 있지만 가운데는 대부분 녹았거나 깊지 않은 잔설이다. 적당히 우회하고 가로지르며 올라붙는다. 바람이 세차다. 덕유급은 되겠다.

거침없이 솟는 모나크봉을 향해 대륙 분수령 큰 줄기를 등지고 총총 발길 옮긴다. 초입에서 뒤따르던 낯선 일행은 되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무 하나 없는 바람찬 모나크 성채, 곧게 뻗은 수직 절벽 위를 내지르는 맛이 더없이 장쾌하다. 저 끝 봉우리 아래가 심슨 패스란 기대 하나를 야무지게 움켜쥐고서... 조카녀석, 눈치 빠르다면 지도를 보고 우리가 이 길로 접어든 걸 추측하고 망원으로 당긴 뒷모습 한 두 컷은 담아 두리라...

“역시 산은 능선 타는 맛이야...” 함선생은 능선이 부드러운 소백이나 덕유 같은 육산 취향이라 비록 길지 않으나마 찬바람 맞으며 산맥의 한 능선을 걷는 느낌에 감격하신 표정이다. 절벽 아래 야생화 흐드러진 들판과 멋진 구도로 점점 박힌 조그만 고원 호수들, 흰 눈 이고 하늘로 사라져 가는 록키 연봉들이 사방으로 장하다.

요즘 보기 힘든 까까머리 부스럼처럼 바닥에 징그럽게 박혀있는 얇은 돌 조각들, 비바람에 차별 침식되어 거의 화투장 두께로 촘촘 포개진 채 모로 박혀 있다. 한두 개 부스러뜨려 보고 만져 본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이 바위 조각들이 마침내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오랜 세월 소리 없이 흐르고 날리다 빙하에 녹아들면 레이크루이스의 신비한 물빛을 내게 하는 모레인(빙퇴석 moraine)이 되는구나... 투명함 잃고서야 얻은 신비한 물빛의 근원은 가차 없이 몰아치는 산맥의 바람 속에 있었던 거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불러가고 불러오는 힘, 모나크 성벽 타고 흐르는 바람 속으로 태평양 건너온 내 조그만 살덩이도 조금씩 풍화함을 느낀다.

그래, 풍화하라! 누가 알랴, 쉼 없이 풍화하며 보이지 않는 먼지로 되돌아가는 나의 살과 뼈와 호흡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따라 흐르다 마침내 이름 모를 저 호수 바닥 깊이 가라앉고, 수억 년 지난 후 또 다른 산맥으로 솟아나기를 꿈꾸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느 배 주린 고기의 뼈와 살로 되돌아오는 기쁨을 누리게 될는지... 부활이란, 이름으로 굳어버린 사물 이전, 존재의 기슭에 머무르는 것. 침묵으로 속삭이며 끝없는 건너오는 그 미묘한 터전에 찰나의 머무름으로 솟아나고 사라짐이 아니던가.

한 의문이 떠오른다. 사물의 꿈, 수억 년 전 바다 속에서 태어난 산맥이 눈을 덮고 서 있거나 눈 녹은 물을 그것이 왔던 바다로 쉼 없이 흘려보내고 있을 때, 그건 어떤 경험 이전의 기억이며 역사 거슬러 선사로 이어지는 꿈인가?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흘러들며 되돌아가는 세계. 산맥은 영원한 침묵의 선험(先驗) 세계에 속하며 그렇게 되돌아가고 있었다, 바다로 바람으로...

우리의 체험이 사물의 본래 모습 그대로라면 사물은 인간과 청정하게 마주하며 동화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 주관적 경험 세계에 사는 우리는 되돌아갈 곳을 잃었다. 경험을 넘어 물(物) 이전을 직관하려는 헛된 욕망은 절망할 우주만을 아득히 펼쳐놓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시공의 경험이 더 필요한 것인가? 어떤 심원한 지혜가 나타나 이 덧없는 무량세계를 상실 없는 영원회귀의 꿈에 적셔줄 수 있을까...? 


길은 없어졌다 나타나고 끊어졌다 이어진다. 은근히 불안해지며 인터넷에서 본 트레일 정보를 떠올린다. 심슨패스에서 어디까지, 눈 덮이고 질척거리고 snow bound, wet & muddy... 우회하고 가로지르고 질척거리면 재겨 딛고, 아직 별 문제 없다. 눈 녹는 바닥에 돋는 키 낮은 식물들이 막 피워내는 푸른 잎의 안간힘을 지금이 아니라면 어찌 엿볼 수 있으랴.

삼십분쯤 갔을까. 첨으로 사람을 만났다. 험한 바람에도 용케 제 키를 지켜낸 관목 한 그루 뒤에 젊은 남녀 한 쌍이 쉬고 있다. 동류를 만났다는 동물적 반가움이 앞선다. 능선은 멀리서 보기보다 길었다. 시속 사오킬로 이상 속도로 걷는데도 끝은 쉬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럭저럭 한 시간이 지나고, 모나크봉도 멀지 않아 심슨패스가 보일 만하기에 왼쪽을 굽어보니 여전히 아찔한 낭떠러지다. 곧 관목이나 다를 바 없는 이삼 미터 키의 침엽 수풀이 나타난다. 눈이 덜 녹아 인적 드문 탓인가, 숲 사이로 길의 윤곽 흐려지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깊지 않은 숲이지만 무작정 파고들기도 꺼림칙하다. 길이 이리 지나가는 게 맞긴 맞는 건가, 심슨 패스를 벌써 지나쳐 버린 게 아닐까... 

“얘네들은 눈이 덜 녹으면 아예 다니질 않는 모양이구만...”

길이 흐린 이유를 남 탓으로 돌려보지만 마음은 벌써 초조하다. 함선생의 표정도 어둡다. “아까 그 젊은 친구들에게 심슨 패스가 어디인지 물어볼 걸 그랬나...” 중얼거린다. 

언뜻 보아 모나크봉 앞쪽으로 도무지 고갯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숲을 뚫고 나가면서도 내려가는 길이 어디쯤일까 꾸준히 왼쪽 절벽을 기웃거린다. 달라붙듯 기어 내려갈 만한 층층바위가 한군데 있다. 그나마 반가워 “길이 어디나 분명치 않을 거 같은데 이리 따고 내려서는 게 어떨까요?” 

함선생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오래 전 겨울산 바윗길에서 다친 적이 있어 바위는 영 싫으시댄다. 하긴 가까스로 절벽 면한 그 바위비탈은 아무리 봐도 길은 아니다. 지도를 받아왔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와 낭패감. 그러나 어쩌랴, 돌아설 순 없다. 뭐, 끝까지 가다 보면 심슨패스가 나오겠지, 체념 어린 심정으로 다시 덤불을 뚫고 간다. 기어이 모나크봉 코밑까지 다다랐다. 그제야 숲이 한 쪽으로 비켜나며 시야 트인다. 황급히 왼편으로 달려간다. 역시...! 일말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보다 높이 치솟기 위해서 보다 넓은 토대가 필요하듯, 수 킬로 천연성벽은 봉우리 직전까지 와서야 완만한 비탈로 바뀌며 산뿌리를 넓힌다. 더 좋은 건 비탈면과 그 아래 조그만 호수까지 이어지는 초원이 온통 들꽃밭이다. 비탈 꽃밭 사이 희미하게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여깁니다”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심슨 패스가 이 구석에 박혀 있었구만. 그나저나 왜 이정표 하나도 없냐? 이 넘들, 보기보단 트레일 관리가 엉망이잖어... 그러나 흔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황송할 지경이다.

흐릿한 길 얼마간 내려오다가 함선생이 용변차 뒤돌아선다. 혼자 여남은 걸음 내디뎠을까? 이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왼쪽 수풀 속, 무언가 부딪치며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큰 바위 사이 나무 한 그루가 꺾일 듯 휘청거린다! 반사적으로 걸음 멈추며 혹 바람인가 싶어 다른 나무들을 살핀다. 아니다! 순간, 또다시 허둥대듯 부스럭거리는 소리! 묵직하다. 뒷골이 뻐근해지고 등줄기 서늘해진다. 뭐지?! 최소한 엘크 정도의 덩치를 가진 짐승, 그것도 그리 날렵하게 움직이지 않는 짐승이란 직감이 든다. 곰?! 곰을 만나면 제자리에 서서 최대한 크게 보여야 한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혼자보다는 둘이다! 계속 그 쪽 주시하며 뒷걸음치듯 함선생에게 다가갔다. 남 용변에 모 볼 게 있어 그러냐는 듯 당황한 표정이다. 다행히 더 이상 아무 소리나 움직임이 없다. 영문을 모르는 함선생은 앞서 비탈길을 내려가고 나도 말없이 뒤따른다. 백여 미터쯤 지나오자 다소 안도한다. 바위와 나무에 가려 뭔지는 모르지만 그 넘도 우릴 피하느라 부산 떨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제서야 함선생에게 얘길 꺼낸다. “지나왔으니 말인데요, 어쩌구 저쩌구...”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주위 한번 살피더니 지팡이로 겨우 쓸 만한 나뭇가지 하나 집어든다.

“곰이 나타나면 이게 좀 도움이 될려나...?” 말꼬리를 흐리며 진지한 어조다.

긴장한 중에도 터져나는 웃음 참으며, “전혀 안 될 거 같은데요...?”

어쨌건 둘 다 과민한 상태다. 설상가상 또 길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여태의 비탈길이란 것도 겨우 한두 사람 지나간 흔적 눈 낮춰 보며 풀 짓눌린 자국 따라 걸었는데 그마저 없다. 난감 난감... 지그시 밀려오는 두려움. 이 와중에 어쩌자고 자꾸만 꽃은 눈에 든다. 꽃밭, 꽃밭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네~~

될 대로 되라 누워버리고 싶지만 눈 녹은 바닥은 질퍽하다. 불안 떨치려 딴전을 핀다.

“이 들꽃들... 아까 그만큼 보고 또 봐도 도무지 싫지가 않네요...”

함선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가 없다. 이 판국에 꽃타령이라니, 이 인간 제정신인가 하는 눈치다. 대신 걸음 빨라진다. 곰 만나면 무조건 덩치 크게 보이랬는데, 웬만하면 둘이 같이 붙어 움직이면 좋겠는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함선생님, 걸음이 너무 빨라요, 자꾸 왔다갔다하지 말고 체력을 아끼셔야죠”

“당황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리 되네요....” 당황이란 말이 한순간 나까지 당황케 한다.

이럴수록 침착하자.... 주변을 살펴본다. 아래쪽으로 말라 가는 호수 보이고, 멀리 가야 할 방향으로는 숲이 가로막고 있다. 어느 쪽도 길 흔적은 없다. 한참을 왔다갔다하던 함선생,

“돌아갑시다, 힐리 패스까지 두 시간이면 될 겁니다. 어둡기 전에 돌아갑시다.”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고 젖어 있다. 머릿속 휑해지며 몸에 기운이 빠진다. 이런, 록키의 산중에서 우리가 길을 잃긴 잃었구나... 암담해지며, ‘어떻게 되겠지...’ 하던 한 가닥 기대조차 무너져 내린다. 아까 보았던 휘청대던 나무와 부스럭거리던 소리, 어저께 들었던 짐승 울음소리...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여기는 분명 캐나다의 산중이지 동네 뒷산이 아니야, 저 막막한 침엽수림 속에는 어떤 놈들이 있을까. 나도 미쳤지, 늘 들고 다니던 지도를 오늘따라 무슨 맘으로 팽개쳤을까...

온갖 뿌리치고 싶은 생각들과 후회가 머리를 짓누른다. 몇 년 전 혼자 밤산행하다 무릎이 아파 칠흑같이 어두운 길 없는 계곡을 헤매며 내려오던 기억, 그 때의 심정이 지금보단 나았을 거다. 한편으로는 ‘여기서 돌아갈 순 없어, 있던 길이 없어질 리는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산이라면 능선에서 봐 두었던 계곡 입구 방향으로 무작정 숲을 뚫어 보겠는데... ’ 하는 오기도 치솟는다.

“잠깐만요, 여긴 해가 늦게 지니까 돌아가더라도 아직 시간이 많아요, 어찌됐건 저 능선에서 여기를 가로질러 저 숲으로 가는 길은 있습니다. 눈 녹고 꽃도 피고 근래 사람이 다니질 않아 흔적 없어졌을 뿐이지요.” 막상 얘길 꺼내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머리도 맑아진다.    

“이렇게 하죠, 시야에 들어오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숲 가장자리 따라 길을 찾아보죠. 삼십분이면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도 길이 안 보이면 돌아가지요.” 발길 흩어지는 초원과 달리 울창한 숲 속으로 난 길 입구는 뚜렷할 수밖에 없으리란 당연한 상식이 왜 이제야 떠오를까.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마찬가지였던지 함선생도 기꺼이 동의한다.

“일단 가까운 쪽부터 살펴보죠, 그게 체력소모도 덜하고, 상식적으로 보아 능선에서 내려온 길은 가까운 숲으로 곧장 가든가, 호수를 거쳐 다시 숲으로 이어질 거 같거든요.”

곧바로 숲 가장자리를 훑어나간다. 그러기를 십여 분, 숲 사이로 뚜렷이 드러난 길이 보인다. 능선 내려와 사라진 길 흔적 더듬으며 삼십분 이상을 헤맨 셈이다. 함선생은 여전히 안심이 안 되는지 여간 걸음이 빠른 게 아니다. 평지에 가까운 길인데 따라가려니 숨이 차다. 물도 마시며 좀 쉬어 가자 하니 ‘아직 안됩니다, 조금 더 가서요’ 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숲 사이가 훤히 트이며 멋진 호수가 보인다. 길 잃은 게 언제였냐는 듯 담배도 피고 사진도 찍으며 느긋하다. 


길에 접어드니 걸음이 가볍다. 이정표가 보인다. 근데 힐리패스와 심슨패스 방향 갈림길? 황당하다. 심슨 패스를 지나왔는데 무슨 심슨패스가 또 있다냐? 아니, 그럼 그 바윗뎅이봉 코밑에서 내려온 길이 심슨패스가 아니었어? 아니면 이 넘들은 패스 가는 길도 패스라고 부르는 건가...?

다시 불안해진다. 이거, 우리가 엉뚱한 데로 빠지고 있는 거나 아닐까...? 그러나 스스로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선샤인 빌리지로 나가는 방향은 분명하다. 능선에서 내려다본 바로는 빌리지 입구를 거치지 않고 계곡 빠져나가는 다른 길은 없었다. 한참을 가니 벌판이 나타나고 또 이정표가 서 있다. 에구머니나, 여기가 바로 심슨 패스라네~~ 힐리크릭과 선샤인 매도우, 아시니보인 파크의 갈림길이란다. 아하, 어렴풋 감이 온다. 우리의 방향감은 정확했지만 지도에 대한 기억은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쩝, 어서 가서 지도를 좀 봐야지, 아무래도 오늘 우리가 미친 짓 한 거 같애. 게다가 둘만 이렇게 말도 없이 내뺐으니 다른 일행들 무지 기다리며 욕께나 하겠구만...

부지런히 걷는다. 힐리패스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가 머잖았을텐데... 중얼거릴 즈음 ‘아니, 저게 누구야?’ 정선생 부자가 거짓말처럼 삼거리에 앉아 있다.

“여태 안 내려가고 우째 여길?”

벌써 하산했을 거라 여겼던 일행을 만나니 우리야 뛸 듯이 반가운 게 당연하나 더 반가워하는 건 그쪽이다. 머가 이상하다...? 일분도 지나지 않아 매형과 조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들이닥친다. 아니, 도대체 뭔 일이라냐?

힐리패스에 도착한 이들은 우리가 이집트 호수 쪽으로 간 줄 알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영 돌아오질 않더란다. 기다리다 지쳐 ‘도대체 그 대책 없는 인간들이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하며 더 늦기 전에 내려가자고 하산길 잡았고... 패스를 오르내리기에는 좀 늦었다 싶은 적막한 숲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숲 속에서 나무가 우지끈거리며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나. 도대체 누가 그딴 싱거운 짓을? 배고파 성질 돋은 곰탱이들이 애꿎은 나무에다 격파 연습이라도 했을까? 사람 없는 울창한 숲길, 그러잖아도 은근히 공감각적 상상력이 발동하던 터에 그 소리 듣고는, ‘에구, 곰이야!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김씨 부자, 정씨 부자가 각기 나뉘어 꽁지 빠져라고 날듯이 내달렸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정선생 부자의 애틋한 정은 얼마나 눈물겨웠던지. ‘아비는 곰밥이 되더라도 아들만은 살리리’ 하고 아들을 앞세우고 뒤따르는데 앞서가는 아들은 또한 아버지가 걱정되어 연신 뒤를 돌아보곤 했다는 거디었다(이 대목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달밤에 볏단 나르는 형제를 떠올렸다). 총알같이 내달려 개울가 삼거리에 이르러 겨우 한 숨 돌리는데, 엉뚱한 방향에서 우리가 나타났으니 어찌 안 반갑고 배기겠는가. 멀리서 사람 모습이 너무 반가웠던 정군은 그게 우리인 줄도 모르구 ‘헬로, 헬로’를 연발했다나 어쨌다나...

얘길 들은 우린 힐리패스까지야 곰 나올 데 어딨냐며, 우리가 길 잃었던 곳이랑 헷갈리는 심슨 패스가 궁금하여 어서 지도나 내 보라며 재촉했다. 이게 뭐야? 힐리 패스에서 모나크봉을 거쳐 길을 찾아 첨 쉬었던 호수까지는 트레일을 표시하는 빨간 줄도 까만 줄도 없다. 대신 애초 보이지도 않던 엉뚱한 트레일이 진짜 심슨패스에서 그 호수까지만 이어져 있다. 이런, 길이 없으니 길 잃는 게 당연하지, 졸지에 완전히 미친 넘 됐다. 캐나다 록키가 어디 동네 뒷산이래냐? 예까지 와서 무작정 길 없는 길 내지르는 못된 버릇으로 기어이 길 잃고 헤맸으니... 속수무책으로 정신없는 아저씨들 아니냐는 꾸중이 빗발친다.

그러나 오늘따라 무슨 생각에서인지 늘 들었던 지도를 내려놓았기에, 길 없는 길로 들어 그림 같은 고원 호수들로 누빈 들꽃 초원 굽어보며 눈바람 부는 능선을 걸었고, 곰밥의 공포에 쫓겨 가며 꽃밭에서 길 잃고 생사의 집착을 쬐~끔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래서 저 깨달은 자, 붓다는 빈손을 들어 보였던가? 길 찾는 중생들아, (지도를) 내려 놓거라...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우린 곰 얘기랑 길 잃은 얘기로 정신없이 배 잡고 뒹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하늘 노래지던 절박함은 까맣게 잊은 채. 함선생은 길 잃었단 확신이 들었을 때, 문득 부인이랑 애들 얼굴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치며 이역만리 캐나다로키까지 와서 곰밥이 되나 싶어 눈물이 앞을 가리며 목이 메더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때의 목소리는 좀 젖어 있었던 거 같다. 나도 그 못지않게 암담했던 건 사실인데 그 얘길 듣고 짐짓,

“아, 산 좋아하는 사람, 산 다니다 곰밥 될 수도 있지요, 머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난 죽어도 그냥은 못 죽어요, 아까 내가 막대기 하나 들었잖아요, 곰밥 될 때 되더라도 그 넘 끌어안고 한 판 씨기 딩굴어라도 봐야지 싶더라구요...” 참 대단한 아저씨야...

매형이 거든다. “곰 발톱이 얼마나 무지막지한데 안고 뒹굴어요, 뒹굴길?”

“막대기 하나들고 곰 잡는 건 무슨 영화에 나오는 거 같은데, 거, 영화 넘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다들 배 움켜쥐며 한마디씩 거든다.

“곰이라고 뭐 무턱대고 뎀비겠어요? 사람이야말로 골 때리는 짐승이잖아요, 지놈도 닭대가리가 아니 바에 사람 맞닥뜨려 좋을 일 없다는 것쯤은 알 껄요? 아까 함선생님 용변 볼 때 부스럭대던 게 뭔지는 모르지만, 만나서 피차 좋을 일 없다 싶으니 그 넘이 알아서 피해 갔을 겝니다”

아전인수도 유분수지, 꿈보다 해몽이 좋구만.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죄 없는 곰과 길 없는 길 헤매고 다닌 무모함을 안주 삼아 또 하루가 저문다.

 

'산과 여행 > 해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팔 안나푸르나 2(끝)  (0) 2007.06.04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980317~) 1  (0) 2007.06.04
캐나다 4(끝)  (0) 2007.06.04
캐나다 3  (0) 2007.06.04
캐나다 로키(010628~010710)  (0) 2007.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