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보고 산을 보고 사람을 본다 -조 식-
첫날, 중산리에서 세석까지
대구 서부정류장에서 여섯시 반 진주행 버스, 진주에서 여덟시 오 분 중산리행 버스를 갈아타고 산행 들목에 도착한다. 버스 내리니 아홉시 십분.
다시 지리를 오른다. 이번 산행은 몇 번 동행한 적 있는 인터넷 동호회의 대간 종주 시작하는 팀에 묻었다. 단풍 산행으로는 이르지만 진작 가을 지리를 벼르던 터라 좋은 기회다. 팀 구성은 이십대에서 사십대까지 여덟인데 어쩌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중산리에서 올려본 아침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소리치면 들릴 듯 천왕봉이 선명하고 가깝다. 배낭 점검하고 산을 오른다. 이박삼일 먹을거리에 비박 장비까지, 평소보다 많이 벅찬 어깨에 걸음은 느리지만 가을바람 맞으며 산으로 드는 맛은 일품이다.
비교적 완만한 길이 칼바위까지 이어진다. 그 너머 2km 가까운 가파른 계단길이 죽을 맛이다. 얼마만의 풀-배낭인가, 자꾸 누가 어깨를 잡아당긴다. 대책 없이 소주 대병을 양쪽에 꽂은 청춘, 재상은 아저씨들 배려하여 부러 그러는지 자꾸 처진다. 짐이 많아 가장 배낭이 무거울 듯한 젊은 성구도 마찬가지다. 시야 없는 계단길 쉬기 꺼리는 성미도 죽어 길가에 걸터앉는데 물 한 통 달랑 들고 헉헉대던 아가씨가 묻는다.
“아저씨, 법계사가 얼마나 남았어요?”
“오백 미터 남짓 될 겁니다”
1km는 족히 되겠지만 능청스레 둘러댄다. 평소보다 걸음이 느려 길이 늘어진 탓이기도 하다. 또 누가 묻는다.
“저 꼭대기에 뭐가 있어요?” 심술스런 농끼가 섞인 말투다.
“아무것도 없어요!” 희억씨가 대꾸한다.
정답일 게다. 우린 아무것도 없음을 오른다. 산은 천연덕스럽게 ‘없음’을 푸른 하늘로 망망 드리우고 묵묵할 뿐이다.
계단길 끝나자 비로소 정상 능선의 조망이 거침없이 트이고 법계사가 보인다. 천왕봉 주릉을 병풍으로 두르고 고지 테라스에 널찍이 자리 잡은 앉음새는 언제 보아도 시원하다. 중산리길은 지리 오름길 중 가장 못마땅한 코스 중 하나지만 법계사가 보이는 그 자리만은 가슴이 탁 트이는 눈맛을 선사한다. 천왕봉 좌우로 우람한 산줄기는 벌써 주목과 구상나무의 상록을 북돋우며 울긋불긋 단풍이 묻어온다. 그 빛에 바람 더하니 오롯이 한 폭의 풍광(風光)이다.
로타리 산장에서 라면 끓여 요기 한다. 금강도 식후경이라, 부른 배 두드리며 부신 눈 가늘게 뜨니 쪽빛 하늘 깊이 몇 줄 흰 구름이 걸린다. 근심 많은 짐승이 살아갈 나날, 저리 맑은 날이 몇이나 될까...
천왕봉을 향해 오른다. 느려진 걸음 숨 돌리며 돌아보니, 은빛으로 가물거리는 바다가 보인다. 사량도 지리망산(智異望山), 바다 너머 먼빛으로 지리를 그리기에 그 이름이던가. 잿빛으로 윤곽 흐린 저 언저리쯤이겠다. 오늘 같은 날 그 산 오르는 이들, 신기루처럼 뜨는 지리를 바라보며 낯빛 더욱 환해지리라. 여기서는 그저 은빛 아른거리는 지평이지만 그들에겐 수만의 물비늘로 반짝여 올 한려(閑麗)의 수평이겠지... 불현듯 남해 가을 물빛이 그립다. 인상파 화가처럼 윤곽보다 먼저 명암을 보고 그림자를 통하여 빛을 본다.
드디어 천왕봉. 평소의 두 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바람이 제법이다. 붐비는 정상부를 비켜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주릉은 칠팔부 능선까지 물이 들었다. 깊게 가라앉으며 일어서 중봉을 이루고 다시 뼈대 세워 하봉 너머 달리는 능선 일대가 가장 단풍이 곱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류들은 눈계절을 예고하는 바람도 아랑곳없이 원색의 파도 사이사이로 꼿꼿하다.
굽이치는 산맥의 주릉이 오늘처럼 깨끗이 눈에 들긴 처음이다. 잡힐 듯 가까운 촛대봉, 그 너머 세석의 느린 비탈도 울긋불긋이다. 멀리 둥글게 솟은 반야봉과 노고단, 거기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내리다 치오르는 만복대, 움푹한 정령치 건너 고리봉도 보인다. 산줄기는 끝이 없지만 저기까지가 가야할 길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도무지 이 크낙한 산의 무게로 드리워져야 할 적막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탐욕스레 번뜩이는 카메라의 시선과 단풍보다 현란한 소리의 빛깔들. 무전기의 키-톤, 휴대폰의 입체화음까지... 이 산중에서 다시 어디로 몸을 돌려야 하나?
그러나 몇 걸음만 내려서면 첩첩 아득한 산과 신비롭도록 푸른 하늘... 지리 한가운데서 지리 너머를 본다. 여태 지리에 서면 사방으로 굽이쳐 가는 너른 가슴에만 눈이 멀었다. 지리의 드높은 벽에 갇혀 오직 지리밖에 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오늘처럼 맑은 날, 남해 바다 너머까지 이르는 산빛의 울림은 돌아오지 않을 메아리가 된다. 먼 산들과 푸르게 그늘져 오는 외롭지 않는 줄기들이 벅차게 다가온다. 가장 높고 멀리 향하는 시야를 열어주는 지리, 열려오는 모든 것들이 머무는 자리에 오늘 다시 섰다. 푸른 섬들 떠 있는 남해 바다에서 덕유와 가야, 그리고 무등까지... 반도의 심장, 역사의 혈맥이 푸르게 사라져간 흔적의 자리.
동남으로 멀리 진주가 보인다. 그 옆 희끗하게 부셔오는 물빛은 남강인가 진양호인가. 산 이력 깊은 상득이 먼빛의 방향을 가늠해 준다. 하동 광양을 나누는 섬진강과 그 끄트머리쯤 광양제철의 흰 연기가 뚜렷하고, 검고 우뚝한 능선을 그어 올리는 저 곳은 남해섬이겠다. 동서남북 사방과 천지가 아득하기도 하다.
갑자기 바빠진다. 대간 무사 종주 기원을 고유(告由)하는 젯상이 푸짐하다. 지리산 신령은 옛날부터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 알려져 있다. 천왕봉 바로 아래 성모사(聖母祠)와 상(像)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바위봉 서남쪽 양지바르고 전망 좋은 공터가 그 자리가 아닌가 싶다. 숙연히 절 올리고 송화주로 음복한다.
네 시가 가깝다. 느린 걸음에 여덟 식구 점심 먹으랴, 고유하랴 이래저래 많이 지체했다. 페이스 꿋꿋한 기영이 이 진도로는 어둡기 전에 세석 떨어지기 힘들다고 재촉한다. 천왕봉을 내려 제석봉을 돌아 능선을 걷는다. 돌아보면 파란 하늘 아래 천왕봉은 더욱 우뚝해진다. 제석봉 일대 고사목들이 많이 넘어져 있다. 작년만 해도 이만큼은 아니었던 듯한데, 모질었던 지난 태풍 때문일까, 하염없는 세월 속으로 그만 풍화하고 싶었던 걸까.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흐르듯 걸으니 어느 새 장터목이다. 백무 쪽으로 전망 트이는 탁자에 앉았다. 맨살에 닿는 바람이 차다. 물을 보충하고 나서는데 누가 부르며 압박붕대를 찾는다. 배낭이 가장 무겁던 성구의 무릎이 시원찮다. 앞서 가던 힘 좋은 상득이 제 배낭을 맡기고 되돌아와 성구 배낭을 멘다. 우리 셋만 뒤로 처진다. 무릎을 압박케 하고 밤마실이라도 나온 양 최대한 느리게 걷는다. 숨찰 일은 없지만 워낙 천천히 걷기에 촛대봉 부근에서 벌써 해가 저문다. 반야봉 위로 거대한 노을이 걸린다.
어디 저런 회심(回心)이 있으랴. 사라짐은 하나의 결단, 내일의 새벽을 향해 던지는 신생의 약속이다. 침묵의 다짐은 덧없는 울림이 되어 사방을 물들인다. 가로 뻗은 엷은 구름 사이로 느리게 해가 내리더니 한순간 온 산을 주홍으로 물들여 놓는다. 하늘과 공명하는 산, 일거에 단풍능선을 휩쓸며 붉은 해일이 덮친다. 지리 팔경을 끌어댈 바 없이 저 찬란을 누리는 잠시만으로도 오늘 산행은 벅차다.
아직 랜턴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시간, 급해지던 마음이 누그러지며 어스름 내리는 산길을 음미하듯 간다. 종종 무박산행 다니며 앞 밝혀 길로만 미끄러지기 바빴는데 오랜만에 누리는 각별함이다.
세석산장 불빛이 보인다. 곧 따뜻함과는 거리 먼 불야성이 된다. 연휴 첫날이라서인가, 팔부 능선의 밤 궁전은 산중의 인산인해다. 유원지가 따로 없다. 바람은 매섭다. 산중 찬바람이야 도리 없지만, 무슨 좌선 수행객들인지, 복도에서 앉은뱅이 잠잘 한 뼘 자리다툼이 뜨겁다. 예약을 못해 비박 준비를 해온 터라 복도를 포기하고 치열한 노력 끝에 탁자 옆에 자리 잡았다. 푸짐한 안주에 소주잔이 돌아가니 몸이 녹는다. 산장보다 한 층 높은 삼층밥을 넉넉히 지어먹고 줄줄이 자리를 편다. 긴 숨 들이쉬며 한 걸음 나서니, 멀리 가물거리는 진주의 불빛이 그리움인양 따스하다. 누운 머리 위로 비스듬히 별빛은 떨어지고 지리산 맑고 찬 바람이 코를 간질인다. 고대광실 산장 안방에서 숨 막히는 이들이 누구더냐...
그러나 밤새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경남 어디서 온 팀은 연락 두절된 일행이 있다며 밤새 우왕좌왕이다. 새벽에는 일출 보러 떠나는 이들의 소란, 깊이 잠들긴 힘들겠다.
둘째 날, 세석에서 노고단까지
새벽잠 많은 게으른 몸이 산에서는 일찍 깬다. 촛대봉 위로 새벽안개가 걸린다. 안개는 미리 오는 아침의 그림자. 그림자는 빛에 속하기에 동녘이 붉게 물들자 안개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세석평전 너른 벌판도 단풍의 물결로 깨어난다. 햇살 넉넉하나 바람 찬 세석의 단풍은 철쭉무리 틈에서도 어깨 높이지 않는 현명함이 있다. 한 시절의 폐허가 이제는 어엿한 숲이 되어간다. 산천의 하루는 저리 맑고 고요하게 다가오지만 산장의 주말은 분주하게 시작한다. 엊저녁 남은 밥을 개죽처럼 말아 빵빵하게 배 채우고 길을 나선다.
영신봉을 올라서니 남으로 뻗는 삼신봉 줄기가 우렁차다. 오르지 못해 더욱 먼 왕시리봉 능선도 대단하다지만, 삼신봉은 특별한 기억의 장소다. 단풍이 유난히 고왔던 어느 해, 청학동으로 오른 삼신봉은 산행이력 얕은 내겐 지리 주릉 최고의 전망대요, 오색 빛의 바다에 떠 있는 등대섬 같았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수십리 산줄기와 영신봉을 기어오르는 육감적인 원색 능선을 올려다보며, 좌우의 대성 거림골을 가득 채우며 넘실대던 파도에 떠가는 느낌은 차라리 희열이었다. 속된 현란을 초월하여 가없는 적멸의 울림으로 오던 그 빛의 물결은 설악의 가을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제보다 좀 속도를 낸다. 나이는 못 속이는가, 젊은 일행들이 앞서간다. 여전히 기영씨는 꿋꿋이 중심을 지키고 희억씨와 나는 조금 처져 보조를 맞춘다. 덕평봉 아래 선비샘의 물맛이 달다. 이후 벽소령 산장까지는 비교적 걷기 편한 길이다. 그러나 산장에 묵고 천왕봉을 향하는 인파에 밀려 좁은 길에서 번번이 비켜선다. 벽소령 가까워지며 왼쪽으로 시원하게 조망이 트인다. 저 멀리 당당히 솟는 봉우리가 왕시리봉인가. 산장에서 쉬며 간식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운다. 점심 먹을 연하천까지는 아직 시간 반 이상을 걸어야 한다.
햇살과 그늘이 번갈아 드는 길, 말없이 걷는다. 형제봉 너머부터 재상은 줄곧 삼각고지를 더듬는다. 그 곳은 지리 주릉을 북에서 조망할 수 있다는 삼정산 능선의 기점이자, 도솔암에서 영원사, 상무주암을 거쳐 실상사까지 이르는 암자 순례길의 들목이기도 하다. 삼정산 상무주(上無住)의 명성은 높다. 일체의 집착을 여읜 완전한 깨달음을 뜻하는 그 이름의 자리는 아직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매혹으로 남아있다. 가지 못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길. 집착 버리지 못한 마음은 이정표 선 갈림길에서 지도 꺼내들고 한참을 서성인다.
햇살 쏟아지는 연하천(煙霞泉) 산장, 이름만큼 아늑하다. 여름에만 지나쳤기에 맑은 날의 연하천은 처음이다. 라면에 식은 밥 말아먹고 바위에 기댄다. 은빛 구름은 한가롭고, 낮은 지붕에 걸리는 하늘이 앙상하게 잎 털어낸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깊게 깊게 푸르러 간다. 수년 전 종주 때 기분 나빴던 사건의 기억이 가시며 새로운 그림이 맺혀든다. 식후의 팍팍함 가누며 명선봉을 돌아 토끼봉을 오른다. 토끼봉은 늘 힘들었던 기억이다. 누가 중얼거린다.
“왜 토끼봉일까?”
우리나라 많은 산이름은 유불선(儒彿仙)의 냄새가 강한데 지리는 천왕, 영신, 노고 따위처럼 무속성을 띠는 선가쪽이 강하다. 토끼봉은 좀 별난 이름이다. 멧돼지 산책하는 돼지평전처럼 토끼가 많아서일까? 무식이 용감이라 멋대로 해석컨데, 토끼봉은 오르는 길의 각박함을 따서 지은 게 아닐랑가? 급경사도 아니면서 엔간히 지친 몸이 ‘깽!’ 소리가 날 정도로 낭창하게 밀어 올린다. 가쁘게 헐떡이며 토끼된 기분은 올라보면 알 일이고...
토끼봉 정상은 언제부턴지 모르나 돌바닥 치장이 새롭다. 황폐가 극하여 호사가 되었다. 목통골 너머, 삼도봉에서 지그시 뻗다가 가파르게 내리꽂히는 불무장등 능선을 눈 시원히 바라고 있는데,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가 남쪽 능선을 타고 올라온다. 범왕리에서 오는 길이라 한다. 한 번 올라본 길이지만 비안개만 더듬던 우중산행이었기에 전혀 길의 기억이 없다. 그 분들, 어제는 대성골로 세석을 올라 삼신봉 능선을 따라 쌍계사로 내려갔었다면서 삼신봉의 탁월한 전망을 감탄스레 전한다. 대단한 금슬과 체력들이다. 좋은 산행을 바라는 인사 나누고 돌아서는 분들의 표정이 밝고 평화롭다.
곧 화개재다. 먹고 사는 일이 중하니 지리 남북의 서로 다른 물산이 모이고 나뉘며 한 때 꽤나 흥성했을 곳이다. 휑한 바람 지나가는 빈 고개마루는 식생 복원 한다며 깔끔한 나무다리가 놓이고 자상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잡초 무성한 옛 절터에서 느끼는 덧없는 낯설음이다. 이름은 폐허로 불멸하느니...
삼도봉을 오른다. 전에 없던 나무계단이 화개재부터 수백미터 이어진다. 바위마루인 삼도봉에서 경남 하동, 전북 남원, 전남 구례가 나뉘고 만난다. 왔던 길 돌아보면 함양 산청이 천왕봉을 받들고 꼽사리껴 온다. 이름값 하듯 거침없는 전망으로 천왕봉과 노고단을 넘어 아득히 영호남을 아우르며 굽어본다. 민주지 능선의 삼도봉이 그렇듯 여기는 모임의 자리다. 산은 불러 모아 솟아오르고 모으면서 펼쳐낸다. 그 펼침은 자못 아득하여 사방 너른 벌과 산줄기 물줄기의 근원이 된다. 강의 근원은 산이다. 산은 강으로 향하는 물줄기를 내주기에 산으로 남는다. 강이 끊임없는 산의 기억이라면, 산은 보다 깊은 하늘의 기억일지 모른다.
삼도봉에 머무는 동안 햇살이 많이 낮아졌다. 걸음이 재다.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반야봉을 이번에도 아쉽게 우회한다. 시간도 빠듯하거니와 분수령을 이루는 가장 높은 지점을 잇는 마루금 따라가는 대간 종주에서 위치가 애매한 반야는 통상 빠지는 듯하다. 그러나 찾는 이가 많지 않아 그윽하게 우거진 숲이 그만이라는 소문이다. 입맛만 다신다.
노루목 지나 임걸령이다. 샘물 한 잔 마시고 듬성한 억새에 일렁이는 바람을 본다. 우리 한평생 얼마나 많은 바람을 듣는가. 잠시 상념에 빠진다.
저무는 가을숲에 바람 드는 소리, 잎진 겨울산에 바람 드는 소리, 잡념 후려치며 싸대기 갈기는 덕유의 초원 능선 혹은 소백 설원에 부는 칼바람 소리, 무지막지 바윗덩이 파고들며 세상을 밀쳐내는 대청봉 큰바람 소리, 솔숲에 드는 파도 소리, 댓잎에 비바람 지는 소리... 혼자 듣는 바람소리는 적막하다. 덧없이 흔들리는 몸을 불러가는 소리 같다. 누가 갈대숲에 드는 바람을 세상 끝나는 소리라 했던가.
조숙한 달관이 돋보이던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란 영화가 있었다. 소리의 향연으로 담아낸 흐르는 사랑, 느리게 감돌며 안으로 부는 바람 따라 여울지며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였다. 마지막 장면의 보리밭에 바람 드는 소리, 산사의 새벽 풍경 울리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은은히 메아리져 눈 내리는 소리 -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장독대에 비 듣는 소리, 구비지는 한 평생을 넘어 내리는 아라리 소리,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소리와 소리에 묻혀 가는 사람의 소리, 소리들... 그 소리에 열리는 귀와 눈, 세상을 빈틈없이 채우고 또 시름 함께 비워 사라져 가는 것들...
저물어가는 돼지 평전을 오른다. 오늘 같은 가을 밤, 달빛 흐뭇이 쏟아지면 너른 산마루에서 달맞이하는 산돼지 무리를 상상한다. 덩달아 흐뭇해진다. 그토록 넉넉한 지리...
총총 걸음 다투어 노고단(老姑壇)에 도착한다. 지나온 길 바라보니 멀리 천왕봉이 아슬하다. 저기서 예까지 25.5km, 노고할미가 곧 성모천왕이니 여전히 지리 큰어미의 품안일 따름이다. 어스름 내리는 노고단, 돌로 쌓은 단 위로 노랗게 익어가는 상현달이 곱다. 노고단 정상부는 복원 중이라 예약탐방만 가능하므로 당장 갈 수는 없다. 원추리랑 비비추, 동자꽃, 둥근 이질풀, 구절초랑 쑥부쟁이 따위의 메꽃들이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무리지어 피고 지는 환상의 가족 산책 코스다.
주말인데 노고단 산장은 널럴하다 못해 만포장이다. 다음 구간 함께할 여성 회원 셋이 산장에서 합류한다. 살림도 한결 넉넉해지고 분위기도 새롭다. 물이 풍부한 곳이기에 세수도 하고 발도 씻는다. 치약 없는 양치까지 하니 날아갈 것 같다. 문명의 탈이 이리 두텁구나.
내일은 비교적 헐렁한 코스, 느긋한 마음으로 잔 돌리자 애물단지로 지고 온 대병 소주가 순식간에 동난다. 취한 눈으로 마당에 서니 하늘과 땅, 사방 천지에서 별이 쏟아진다.
“어이! 소주 더 짱박아 논 거 없어?!”
셋째 날, 노고단에서 고리봉까지
오늘은 만복대를 넘는다. 배낭이 많이 가벼워져 힘들 건 없지만, 손에 잡히는 얼굴은 푸석하니 부은 듯하고 입술도 말이 아니다. 대간 종주를 기획한 성구는 산책로를 두고 기어이 입산금지된 종석대를 넘어 성삼재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야 반갑다, 종석대 오를 기회는 지금이 첨이자 마지막일 테니.
종석대 오르기 전 화엄사골 굽어보는 무넹기 전망대에 선다. 발아래 화엄사, 구례를 가로질러 흐르는 섬진강이 보인다. 춘삼월 곱던 그 물빛은 이 가을 더욱 투명해져 얼마나 많은 은비늘로 반짝여 올 것인가.
노고단에서부터 못내 궁금했던 서쪽 멀리 삼각으로 우뚝한 산을 묻는다. 역시 무등산이다. 차별 없는 무무등등(無無等等) 세상의 꿈이 묻힌 곳. 한국 현대사의 가파른 질곡을 묵묵히 굽어보았던 벅찬 이름이지만 고작 기슭의 닭백숙 맛만 기억할 뿐 미련으로 남은 산이다. 그러나 많은 대도시의 닳아버린 진산이 그렇듯, 먼빛으로만 그리는 무등이 더 아름다울지 모를 일...
종석대 오르는 길은 키 낮은 억새가 장관이다. 밀집한 지천이 아니라 성글게 피어나 비탈 가득 흔들리는 모습이 낯익고 정겹다. 생김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종석대는 남쪽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며 정상부는 바위라 서남향으로 열리는 전망이 매우 장하다. 다만 숲이 없어 정면으로 보이는 노고단 산장의 시선을 전혀 피할 수가 없다. 무넹기 목책에 ‘벌금 100만원’ 표지를 보았는데, 저기서 성삼재로 전화 한통 날리면 꼼짝없이 굴비로 엮일 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삼재에서 동호회 정기산행 팀과 합류한다. 인원은 많지 않으나 서울, 경남, 전라에서도 모였으니 가히 전국 규모다. 도로 건너 작은고리봉 방향의 헬기장에 모여 인사를 나눈다.
길은 작은고리봉을 우회하여 뚜렷하다. 봄이면 산수유 흐드러지는 산동 상위마을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있는 묘봉치 일대는 온통 억새 천지다. 안부에서 잠시 쉰다. 만복대 억새 등산객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렁이는 억새 무리 너머 떠오르는 반야봉의 둥근 가슴이 푸근하고 넉넉하다. 한 철 피고 지는 계절의 꽃 억새는 은빛으로 산을 누비며 숲 아닌 숲을 이루어 가는 철의 남은 빛을 탐한다. 활짝 피지 않은 지금의 억새가 나는 좋다. 푸석하니 끝이 갈라지지 않고 윤기가 돌며 힘 있어 보인다. 거기에 금빛으로 변해가는 느즈막 오후 햇살에 일렁이는 바람까지 있다면...! 그러나 한 철 너머 억새인들 또 어떠랴, 단풍 지고 찬바람 불면 백발 나부끼며 무리지어 직립한 채 열반을 건넌다. 지혜의 함께 타는 큰 배, 대승(大乘)의 보살심이 이 무리들 아닌가.
만복대에서 천왕봉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정령치로 내린다. 멀리 남원이 보인다. 커피 한잔 달게 마시고 고리봉을 향한다. 정령치에서 인원이 많이 줄었다. 패러 글라이딩 활공장을 지나 고리봉을 오른다. 점심 반주로 몇 잔 마신 술이 덜 깬 탓인가, 팍팍하다.
고리봉 정상은 바람이 차다. 총총 하산길로 접어든다. 제법 가파르다. 그러나 곧 고만고만한 동네 뒷산 호젓한 솔숲길이 된다. 앞선 이들과 적당히 거리 두고 혼자 걷는다. 묵은 등산 지도에는 ‘독도주의’라 적혀 있지만 국립공원 구역인데다 숱한 발걸음이 누볐을 큰줄기(大幹)라 표지가 뚜렷하다. 이박삼일 산행의 마무리로 더없이 좋은 오솔길을 미끄러지듯 스미듯 간다.
문득 눈앞이 환해져 온다. 하산지점 1km쯤 못미처 쑥부쟁이 만발한 비탈이 펼쳐진다. 이런 과분한 환송연이라니! 누가 꽃다발까지 묶어 길가 나무에 기대 놓았다. 어떤 고운 손길이었을까...? 부질없이 궁금하다.
고기 삼거리가 보인다. 정령치와 춘향묘 있는 육모정 가는 갈림길이다. 짧지 않은 여정이 끝난다. 남은 사람들 기다리며 비어가는 시간을 어슬렁거린다.
산 첩첩 흐려져 하늘빛이 된다. 그건 꿈의 모호함이 빛나는 방식이다. 기대려던 마음이 무너지는 허공, 텅 빈 푸르름 받치고 지리의 가을이 솟는다. 역사만이 지탱하는 줄 알았던 지리도 옛길이 된다. 시간조차 망연히 스러지는 그 곳, 적막의 심연에 내리는 빛의 파편을 거두는 곳은 회오리치는 나의 마당이다.
억새숲에 들던 바람. 바람에 머무는 기억은 다가올 것에 대한 오랜 예감이다. 계절이란 새로움의 반복이니, 흘러가는 것들 고이는 그 곳을 향해 어느 날 나는 또 걷고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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