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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속리 월악 새재권

속리산 가며(010610)

by 숲길로 2007. 6. 4.
 

초여름 가뭄이 깊다. 메말라 가는 들녘.

산은 멀수록 하늘을 닮는다. 모든 멀리 있는 것들은 사라지고 싶다.

죽을 때가 되면 기어이 꽃을 피우고 마는 식물들이 있다. 대나무가 그러하고 잎을 쓰는 담배도 꽃을 피우면 그만 자란다던가. 영동 지나 보은, 속리산 드는 길옆으로 펼쳐지는 담배밭에 꽃들이 총총하다. 죽음을 향해 피는 꽃들...

그러나 사물은 생명을 꿈꾼다. 꽃은 욕망이다. 담배꽃은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다고 여길 때 잎의 쓸모를 버리고 꽃을 피운다. 생식에만 몰두하며 종의 불멸을 꿈꾸다 자살한다. 그래서 꽃은 개체 최후의 욕망이다. 가장 수줍은 포도꽃도 지금 피어난다. 소리 없이 피었다 달빛 사이로 지는 포도꽃의 은밀한 갈망은 온전히 유월의 것이다.

 

대지는 저리 메말라도 아랑곳없이 기름진 숲과 능선들.

밤꽃, 식물의 욕정을 대표하는 당당한 휘날림은 연둣빛에 젖빛을 섞어 흐드러지도록 피어난다. 밤꽃이 있어 유월은 숲은 빛난다. 동물성의 꽃내음, 메마른 욕정은 사방 천지에 날리고 유월은 깊어간다.

 

상주에서 선산 사이 산기슭에 서 있는 키 큰 소나무들, 와락 쏟아지는 울음만 같다. 적송(赤松)의 숲은 저리 검푸르게 어두울까. 덤불 우거져 자라나도 어느 누구도 소리치지 않는 평등, 누군가의 키 자라게 하는 관용. 말없는 그들이 나는 무섭고도 눈물겹다. 거기 너 있어야 할 곳 아님에 차마 터지지 못하는 온갖 꿈들...

 

산을 오른다. 등이 젖고 가슴이 젖고 머리가 젖고 아랫도리가 젖는다. 온통 축축해지면, 그러나 숲으로 드는 바람이 나뭇잎 하나 피해가지 않듯 나의 오감을 피해 갈 수 없다. 오감은 부양(浮揚)한다. 풍요의 감각을 넘어 흐리게 빛나며 자립하는 거대한 허공(虛空). 

산을 오른다. 속리(俗離)라 하여 세속 떠난 곳, 상학에서 천황봉까지 희게 달리는 능선. 저 부신 것들이 부서져 사라질 때까지 시간은 피로를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