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차일능선과 암자들 160131
코스 : 화엄사 대형주차장(08:15) - 원사봉(08:55) - 법성봉재(09:30) - 차일봉(10:05) - 우번암 갈림(11:05) - 종석대(11:30) - 우번암(12:15) - 상선암 토굴(13:15) - 상선암(13:30) - 수도단원(14:05) - 암자터(15:25) - 삼일암(16:00) - 천은사 일주문(16:20) - 주차장
지리산행은 종종 그랬다. 넉넉함과 미진함이 함께 오곤 했다.
돌아보면, 어떤 넘침이 있으면 그 바닥엔 좀 단단히 뭉치고 기우뚱한 모자람이 먼저 있었다. 그 기우뚱을 중심으로
밀고 당기는 물결이 일어나고 소용돌이치는 길이 열렸다. 와르르 소리치며 넘쳐나기도 했다.
어차피 눈산행은 기대하지 않았다. 눈 귀한 동네에 오시는 눈을 보며 지리산 남부분소에 전화하니,
성삼재엔 비 내리고 있다 했다. 뜨악~~.
일말의 혹시나,는 있었다. 비 개이고 습도 떨어지면, 먼산 쨍한 조망이 걸리거나 발아래 엷은 구름이라도 살풋 깔리려니 했다
전날 예보를 확인하니, 다 허사였다. 미련 버리고 암자 잇는 자락길을 찾아보았다.
누군가 멋진 길이라 했다. 조망도 눈도 신통찮을 차일릉 대신,
천은사 겨울 암자 찾아가는 호젓한 지리숲길을 그렸다.
넉넉함과 미진함이라 했다. 딱 그랬다.
확고하게 조망 닫는 박무의 난반사가 능선의 눈과 더불어 열어주는 또다른 세상이 있었고,
다 걸을 때까지도 알지 못했던, 캄캄한 허공 응시하며 돌아서며 비로소 깨닫는 숲의 또다른 영토가 있었다.
잃고 나서야 그 존재를 아는 것, 그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지금조차
알지 못하므로 더욱 잃어야 마땅할 터이니, 지리, 겨울 지리산길은 언제나 내 밖에 있으며
단 한번쯤이라도 내가 그 안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싶은
무엇이며 어떤 곳이다. 그래서 돌아보니
이번에도 과연 지리는 지리였다.
포근한 대기, 눅눅한 아침공기 마시며 내처 걷는 솔숲길.
머잖은 기억 묻어나는 길이라 새로움 없지만 호젓하기 그지없다.
이틀 너머 내린 비로 발에 닿는 산길 감촉은 꼽꼽하니 좋다.
그 비로 능선의 눈도 대부분 녹았다. '1000고도쯤이나 올라야 눈 좀 밟을 수 있으려나...?'
괜시리 속 불편한듯 궁시렁대며 간다.
차일봉 앞둔 첫 조망처에서 돌아보다.
어지간히 올라서면 발아래 깔리겠지 싶던 안개는 일말의 기대마저 뿌리친다. 고도를 잠식하며 지리의 하늘빛 흐려놓는다.
형제봉과 왕시리봉이 안개 우로 겨우 분간될 따름.
차일봉에서 건너보는 종석대와 노고단.
무슨 영문인지 노고단 우에는 안개 감돌고 있다. 이제 고마 저리 가라~~
살짝 당겨본 능선,
종석대 너머 이어지는 대간릉엔 눈 제법 두터워 보인다.
오늘은 종석대를 정면으로 바로 오르긴 어렵겠고...
우회하여 오르는 중.
난반사 뿌려대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난히 부시고 부담스럽다.
오른 만큼 돌아보는 눈맛조차 없이 미련스레 오르기만 하는 노릇은 은근히 지치고 재미없다.
뽑은 땀 무색하게 몸만 무겁다.
걸음 빠른 이, 뉘신가...
당겨본 종석대,
먼저 오른 이 차림을 보니 정상부엔 바람 제법인 듯
돌아보는 노고단, 뿌연 하늘이 슬그머니 맥빠지게 하네~
짧은 억새밭 구간, 지리 주릉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라 나름 이채로운데
하 오랫만이니 더욱 반가울 따름.
기우뚱 흔드는 것은 바람인가, 고도인가?
의외로 춥지 않아 걸음 느리다. 쉼없이 똑딱이며 뒤처져서 간다.
걸음 걸음들, 아름다운 시간...
코재에서 오는 길 만나 이어지는 종석대 오름길,
길지 않으나 돌아보는 느낌이 좋은 구간이다. 원망스럽기만 하던 박무가 오히려 어떤 강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딱 부러지게 이유가 잡히지 않는다. 저마다 장황할 지리산길의 이야기를 품은,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저 배경을 흐리게 지우며 근경만 또렷이 부각시키기 때문일까...
라고 짐작해 보지만 확신은 없다.
오르는 내내 조망 감질나던 차일릉이었으니
눈발 희끗한 종석대 암봉도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와 닿는 듯...
만복대가 보일락말락...
올라온 능선 돌아보다. 차일봉조차 어렴풋...
참고로 3년전 이맘때 조망사진 두엇 가져와 본다.
화엄사골 굽어보는 남녘.
왼쪽이 왕시리와 백운산릉 등등..
가까이로는 섬진강 왼쪽으로 구례 오산, 오른쪽 멀리 가장 높은 조계산
원경 없는 오늘은 근경에 골몰한다.
춥지 않으니 다들 여유로운 자태로~
쉼없이 이어지는 행렬
점심먹기엔 좀 이른 시각, 바람 피한 곳에서 눈부신 억새비탈과 차일릉 굽어보며 간단히 요기한다.
시간상 우번암쯤이 가장 적당하겠지만, 딱히 공양할 바도 준비치 못한 터에
적막한 겨울 산중암자 지키는 스님 앞에서 음식물 꺼내는 건 아무래도 결례에 가까운 노릇일 터.
한참 머물렀던 종석대 놓고 서북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 잠시 걷는다.
겨울 지리..
안개 속이나마 서북릉엔 하얗게 눈꽃 덮였다.
알겠다, 어저께 내린 눈비가 남쪽은 비가 되고 북쪽은 눈이 되었던 듯.
또다시 3년전 원경사진 두엇.
만복대 방향
서쪽, 가장 높은 무등산
당겨본 우번암(별채)
뒤돌아본 종석대
바람 그리 사납지 않으니 쉼없이 똑딱이며 느리게 간다.
겨울산 눈의 육감, 눈의 역동.
순백의 산하는 비현실을 불러오지만 저런 잔설의 얼룩은 초록 떠난 산릉의 사실감을 더하거나 과장한다. 구비는 더욱 구비지고...
당겨본 성삼재쪽
저만치, 벌써 우번암쪽으로 내려서는 이들
뒤돌아보다
풍경, 말하지면 바람과 빛.
바람이 먼저인 것은 늘상 확증되는 온몸의 체감이지만, 오늘만은 빛을 바람보다 앞에 놓아야 할 듯하다.
대기에 만연한 먼지인지 안개인지마저 빛이 되어 주린 눈을 희롱하니,
오직 눈,눈만이 감각과잉으로 떠돌다 탐욕에 지쳐간다.
암자 방향 지능선 삼거리 있는 돌탑봉
암자길 향해 내려서는 이들
간미능선이 흐리다.
우번대에서.
겨울 산중암자의 적막이 오늘은 언감생심이다.
별채까지 들러보려다, 조망없는 데다 왠지 감흥도 일지 않아 저만치 내디뎠다가 돌아선다.
힘든 겨울살림일텐데... 절집인심이 저러하시다.
수북한 곡식알을 보니
'우번牛飜'이란 이름의 유래가 떠오른다. 전래의 불교설화들은 희랍신화 못지 않게 많은 변신이야기들을 담고 있거니와
댓가없이 먹은 좁쌀(맞나?) 세 알 때문에 소가 되어 삼년을 노역했다던 동자승 이야기도 그 중 하나.
희랍신화의 변신이야기는 인간으로부터의 도피와 탈출을 통해 '불멸'이란 주제를 쉼없이 변주하는 반면
불교의 변신설화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교훈을 통해 깨달음과 벗어남의 영역을 가리킨다.
불멸 혹은 해탈, 과연 우린 어느 쪽에 더 기울어지고 싶을까...?
한동안 가파르지 않은 산길, 키낮은 조릿대길이 정겹다.
상선암 토굴.
정확히 말해, 굴이라기보담 토방이다.
고려적 나옹화상도 지리산 상선암 토굴에서 수도했단 얘기 있지만, 그게 저건 아닐 테니
현재 상선암 자리에 있었을 토굴이 아닐까 싶다.
자세히 보면 이 토굴도 상당히 공들여 지었는데, 삼면이 두터운 흙벽으로 꼼꼼하게 닫혀 있고 전면 창호도 꽤 참하고 튼실하다.
장작 넉넉히 지펴넣어 뜨근하게 허리 지지면서 하룻밤쯤만 취생몽사 딩굴면 참 좋을 듯...ㅎㅎㅎ
상선암, 참 편안해 보인다.
암자 마당에서 보는 나무들이 멋스럽다. 다른 계절을 상상한다.
법당 건물이 무척 단정하다. 지금은 실용적인 함석지붕이지만 옛날엔 번듯한 기와였을까?
기와지붕에 유리창호조차 없었을 당시의 모습이 많이 궁금하지만,
지금도 상당한 맵시 돋보이는 자태다.
전방 부연처마에 공포까지 갖춘, 제대로 된 목조건물이다.
신라때로 거슬러 오르는 암자의 연륜과 격이 느껴진다.
우번암 유래의 주인공인 젊은 우번 역시 여기 상선암 수도자였다 한다.
우번의 득도설화는 상투성과 전형성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오히려 흥미로운데
불교설화의 단골 관음보살이 예의 그 낚시전문 작업녀(원래 관음은 남자 아닌가?)로 출연하고, 그 절세 미모에 홀랑 낚였다가
아뿔사! 용맹정진 대오각성하는 캐릭터는 우번의 몫이 된다.
겨울 산중암자의 적막 음미하면서
이끼낀 바위와 웃음 자아내는 이름새김도 살피면서 어슬렁거리는데
공양간쪽에서 웬 인상좋은 중년여인이 불쑥 나타나 환한 웃음 하나 던져놓고 총총 사라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몸없는 그 웃음만 한참동안 허공 가득 떠돌고 있는 느낌...
우아하게 팔벌린 노목(느티?)
이래저래 다른 계절 모습 궁금해지는 암자다.
상선암 나서며..
계곡의 목교에서 천은사향 계곡길 따르지 않고 수도단원으로 이어지는 사면길 접어든다.
좀 묵었으나 퍽 예쁜 산자락길 기대했는데, 의외로 길상태 분명치 않다. 얼마 전 '산에들다'님에게 얻었던 지리산길 지도가 문득 요긴해진다.
수시로 gps 확인하고 길흔적 찾느라 기웃기웃 우왕좌왕, 흔적 없으면 방향만 잡고 간다. 가다보면 곧 흐린 길 나타나고...
숲 역시 기대만큼은 아니다. 고목도 거의 보이지 않고 여느 야산처럼 평범해 보인다.
내 기대가 과했던 걸까? 모든 게 황량해 보이는 계절 탓일까...?
수도단원.
정체모를 곳이다. 아늑한 지리 남자락 거침없이 찢어낸 방대한 규모의 절터, 뜬금없이 큰 건물, 징그럽게 둘러쳐진 담장과 텅 빈 마당...
인기척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위생공간같은 절집이다.
단원이란 이름 별스러워 궁금했는데 막상 대하니 더 들여다보고픈 마음 싹 가신다.
마당으로 내려서지 않고 왼쪽으로 우회하는 오솔길 따라간다.
산신각 자리인데.. 건물은 와 저리 크노?
단정한 맞배지붕 자체는 멋스럽지만 왠지 생경하고 뜨악한 느낌이 든다.
물론 저 절집 안에서가 아닌, 여기 밖에서 보는 관점이니 충분히 피상적이긴 하다.
법당.
'대웅보전' 편액 걸려 있는데 문짝 금칠이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화려하다.
너른 마당 둘러친 낮은 기와 담장, 맑은 날 저 마당이나 대웅전 뚝담에서 보는 조망이 어떨까.. 살짝 궁금하긴 하다.
좋게 말해서, 참 호방한 안목으로 스케일 있게 조성한 절집인데,
대체 누가, 이런 거창하고도 폐쇄적인, 빈집같은 절을 지어 운영하는 걸까...?
들여다보고픈 맘 생기는 곳은 아니지만 또다른 궁금증이 동한다.
포장길 한자죽도 걷기 싫어 연못 서쪽 묘목밭 가로질러 개울 건너야지, 하다가...
연못을 기웃거려본다.
헐~~
대체 이런 멋대가리 없는 저수지는 왜 만들었을까, 싶지만
실용적인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홍수철 사나운 계곡물 받아내는 사방댐 역할과, 가두어 둔 맑은 물을 상수원이나 기타 용수로 쓰면 좋겠다.
모르긴 해도, 엄청남 규모로 조성해 놓은 층층 묘목밭이 결국 잘 닦여진 집터인 셈이니,
건물들 많이 들어서고 거처하는 이 늘어나면 저 연못물은 참으로 요긴할 터.
볼수록 대단한 야심과 스케일이 느껴지는 수도단원이다.
계곡수 내리는 지점에 멋없는 빙폭이 걸렸다.
크고 각잡힌 연못을 보니 막상 건너려는 지점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도저히 내려설 수도 건널 수도 없는 규모의 석축 배수로가 아가리 딱 벌리고 있다.
되돌아나와 포장길따라 당초 예정된 지점으로 간다.
포장도에서 돌아보다.
등지고 나서면서 느끼는 이 곳에 대한 소감은,
허세와 폐쇄성이 공존하는 절집.
밖에서 보는 3중 겹겹 담장과 그 사이 묘목밭, 너머로 빼꼼한 질집 지붕.
산사의 적막과는 전혀 다른, 사람 손길 느껴지지 않는 비인간적 공허감 깃든 곳.
집은 결국 사람의 터전이니 사람이 들어야 이 느낌 바뀔 수 있을 듯.
궁금증 풀려고 검색해 보니,
수도단원 혹은 수도암에 대해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례 천은사에 소속된 암자로 신라 흥덕왕 때 덕운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도선국사에 의해 암자는 다시 중건되었다. 수도암은 남한 제일의 방장 선원으로 널리 알려진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그러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면서 수도암 암자가 소각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수도암의 스님들이 선원 건물을 방광초등학교 건립용 목재로 희사하여 사찰터만 남게되었다. 이후 1980년 평전화상 스님이 수도암 복원을 추진하였고, 대웅전과 산신각, 선원본채, 요사채가 세워졌다.
저 절의 정체는,
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방장 선원이란 얘기.
이제 '단원'이란 묘한 이름에 대해 의문은 사라졌다(그 '단'은 끊을 단斷 아닐까, 짐작해 보지만 이 절의 지금 공식명은 수도선원이다). 대신
먼 훗날의 번성을 다짐하듯, 수도암 선원을 이리 거창하고 별나게 중건한 평전스님에 대해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2010. 8.27 동아일보 기사에 이름이 보인다. 좀 놀랍다.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한불교조계종 구례 화엄사 전 주지 평전 스님(68)의 몸에서 수많은 사리가 나왔으나 이를 공개하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다. 화엄사 수도암은 26일 평전 스님 다비식에서 검은색 붉은색 등 오색을 띤 콩보다 큰 사리 30과와 녹두보다 큰 사리 120과를 수습했다고 밝혔다. 다비식은 화엄사 다비장에서 24일 오전 11시부터 25일 오후 1시까지 진행됐고, 스님 10여 명과 신도 10여 명이 사리 수습과정을 지켜봤다. 사리를 망치로 때리는 확인절차도 거쳤다. 수도암 관계자는 “성철 스님 이후 사리가 이처럼 많이 나온 스님은 없었다”며 “평전 스님에 대한 허무맹랑한 소문이 퍼져 명예회복 차원에서 사리를 공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전 스님은 22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도암에서 제초제를 마시고 숨져 있는 것을 그의 상좌 스님(59)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평전 스님은 구례 천은사 주지와 화엄사 주지를 지냈다. 평소 신도들에게 ‘나 이제 죽는다’는 말을 자주 했으나 특별한 자살 동기는 없었다.
불교계에서는 평전 스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공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수행의 결정체인 사리와 자살은 별개”라는 주장과 “자살을 했는데 사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이 팽팽한 것. 화엄사 관계자는 “불교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사리의 존재를 절에서만 알고 있기로 했다”며 “평전 스님이 수명을 다해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말했다.
자살을 인정치 않는 불교계에서, 명망있는 스님의 자살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래의 유명한 선원을 중건한 의욕 넘치는 스님의 자살은 지금 우리에게조차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건 분명하다.
수도암 앞 개울 건너 몇 걸음이면 암자터.
얼핏 보아선 흥미로운 대목이 없다. 좀 편평하고 질척한 땅, 별 흔적도 보이지 않는 듯...?
다만 한동안 뚜렷이 이어지는 길.
한참 가다보니 또 암자터.
암자터.
축대 흔적 분명하고, 주변 우거지지 않았다면 꽤 그럴 듯해 보일 자리지만
좀 미진한 느낌.
무얼 기대했던 걸까?
폐사지의 유적 유물 따위는 별무관심이지만, 그 공간에 깃든 시간 풍경,
소위 폐사지 분위기라 부르는 무얼 찾았던 걸까...?
물론 그 역시 부질없는 허세 아닌가?
허세 취향 비웃는 아득한 시간의 이끼...
암자터 전후로는 길 한층 뚜렷한데, 계곡 쪽으로도 내려가는 길 보인다.
이후 줄곧 예쁜 길 이어진다.
어쩌면 오늘 눈꽃 대신 암자길에서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길 넓고 뚜렷해진다. 편하지만 재미 좀 덜해지려 한다.
헤아릴 길 없는 이 간사 혹은 가벼움, 참으로 산길 걷는 노릇이란...
뚜렷한 오솔길은 법성봉재 능선길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법성봉 능선길 만나면 널럴한 길따라 계곡으로 내려서는 듯하다가....
삼일암향 지능선 접어든다. 푹신하고 너른 솔숲 산책로.
삼일암.
이번에도 옆구리로 들어서며 보는 첫인상은 절집보담 수더분한 산중 독가같다는...
오른쪽 저 벽없는 건물은 농기구 간수하는 헛간같고.
참한 저 건물은 공양간 딸린 요사채인 듯,
너머 대각으로 법당 지붕이 삐죽하다.
나무들도 멋스럽고...
아주 운치로운 절집이다. 일체의 치장없는 견결함.
거처하는 이는 필시 깔끔하고 까다로운 취향과 성격을 가진 분 아닐까, 지레짐작한다.
적막 흐르는 오후의 겨울산사. 오늘 본 중 가장 맘에 드는 곳이라 할 만할까?
내려놓은 '삼일암' 소박한 현판이 눈길 끄는데,
현판과 함께 무엇을 내려놓았던, 혹은 내려놓으려 했던 걸까...?
글구보니 옆 건물에도 현판이 없는 듯하다.
절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은, 절이 아니고 싶은 절?
어쩌면 여기 머무는 이는 절이라는 형식과 굴레조차 벗어던지고 싶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불가능한) 자유에 대해선 좀더 음미해 볼만하다.
절집 앞을 가리며 한 단 낮게 자리잡은 대숲이 그윽하다. 하산길 마무리로 더할나위 없는데,
만약 저 아래에서 이 숲 거쳐 암자에 들어선다면
무언가 내 속에서 푸르디푸르게 씻기는 느낌이 들지 않을려나, 싶기도 하다.
삼일암 아래 자그마한 주차공간 지나, 포장길따라 내려서며 생각한다.
휘리릭 거쳐온 우번암, 상선암, 그리고 수도선원과 삼일암까지,
무심한 산객은 저 암자들을 하나같이 옆구리 찌르며 혹은 뒷문으로 들었다. 또 겉보거나 지나쳤다.
그건 암자순례의 관점에선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거기 머무는 이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공명하며 무언가를 보려 하기는 커녕
평소와도 달리, 시야 흐리단 핑계로 마당에서 법당 등지고 먼산 한번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놓고 섣불리 갠적 취향과 관점으로 호불호하고, 함부로 평가하려 했다.
승려의 신분으로 자살했다는, 그런데 다비에서 사리 한보따리 쏟아졌다는 평전스님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죽음으로 깨버린 어떤 고정관념, 생전에 세운 거대한 허장성세의 궁전같은 절집.
그가 다시 세운 수도암 자리는 근대한국불교의 중흥조와 파격의 기행승 취급을 동시에 받는 경허스님도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모순 혹은 초월, 견고한 형식을 지탱하는 구성적 결여 혹은 공허, 따위의 말이 떠오르지만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거나 이해될 그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돌아보니
네 암자들을 이으며 종석대에서 내려오며 걸었던 겨울 지리 숲길조차 제대로 보고 느끼지 못했단 생각.
네 암자를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암자를 잇는 길, 그 길을 걷는 과정이 목적이었음에도
길 뚜렷찮고 숲 풍경 신통찮음에 적잖이 당황하고 실망했던 거 같다. 쉽사리, '별 재미없고 예쁘지 않더라'로 정리하려 했다.
조급하고 얄팍했다.
어떤 미진함이 마음 한구석에 밀려든다. 계절을 핑계하지만, 결국은 내 안목과 상상력의 부족일 터이다.
그 길 언젠가 다른 계절에 다시 둘러보고 싶다.
그때는 절집 뒤나 옆구리가 아니라 앞으로 들어, 법당 막 나선 걸음의 자리에서
맑게 드러나오는 먼 산줄기들을 바라보고 싶다.
도로따라 천은사 주차장 바로 가려다 맘고쳐 먹는다. 끝까지 봐야지.
골따라 천은사로 든다. 이번에도 역시 옆구리다. 일주문 지나 저만치 당우들이 건너보이는 지점.
이 느낌만으로도 충분하니 절집으로는 들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선다.
천은사 와본지 얼마나 되었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기억조차 없다.
이 바닥 블록이 그 때는 없었던가...?
물소리 들린다.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조선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썼다는 유려한 필치 '지리산 천은사'가 수백년을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풍수, 바람과 물.
믿진 않으나 거기 기대어 한 매듭 풀어보려는 마음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고 있지 않은가.
사라졌다 돌아온 샘...
지리산 감돌아 흘러온 개울에서 스틱을 씻어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