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반야봉과 이끼폭(070821)
코스 : 성삼재 - 노고단 - 임걸령 - 반야봉 - 중봉 - 묘향대 - 이끼폭 - 뱀사골 - 반선(7시간)
더운 여름날의 산행은 역시 깊고 큰 산이 좋다. 지리산길은 최고의 피서 산행이었다.
노고단 실제 정상부는 근래 상시 개방된 듯하다. 꽃 따라가는 그 길을 한 바퀴 둘러보며 파란 하늘 받쳐든 벼랑 끝에 서서 남녘 지평이라도 한번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다. 노고단 아니어도 서늘한 능선길 따라 둥근 이질풀, 며느리밥풀, 산오이풀 등이 한창 꽃을 피운다. 아마 끝물일 동자꽃과 원추리도 보인다. 높은 곳이라 하나같이 맑고 고운 빛깔들이다.
쉼없이 오르내리는 구름과 벗하며 시원한 반야봉에서 점심을 나눈다. 하늘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
슬슬 내려섰다 올라선 중봉은 바야흐로 눈부신 꽃밭이다. 단조롭게만 여기는 녹음빛 여름산행의 숨은 진미다. 바삐 가는 와중에도 너나없이 걸음 멈추고 찬탄 쏟으며 카메라를 꺼내든다.
모든 꽃은 유혹이다. 생식과 생산의 건조한 규칙 위에 피어난 도취이고 매혹이다. 죽음에 닿는 덧없는 의기양양. 꽃 앞에서 잠시나마 한숨 쏟으며 가 닿는 어지러움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덧없는 환상에 대한 공감이며 황홀일 것이다.
조용한 걸음으로 묘향대에 든다.
아주 독특한 곳이다. 빼어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시선 사로잡는 능선의 고도는 딱 자연스런 눈높이 만큼이다. 심신을 허무로 이끄는 소실점이 시야 안에 없다. 긍정의 거리이며 눈높이다. 그래서 지금 기도처가 아니라 수도처일까? (신을 부르는 기도처는 몰입과 합일의 장소다. 그래서 동굴처럼 닫힌 곳이거나 지평으로 둘러싸인 완전히 열린 곳이어야 한다. 거칠게 말해 기도는 맛이 가야 부름을 듣지만 수도는 그 반대가 아닐까?).
노추산 이성대가 생각난다. 불교와 유교를 함께 넘나든 공통점을 가졌지만 상반된 삶의 궤적을 보였던 고운(최치원)과 율곡이 먼 세월을 격해 수학/수도의 인연을 이은 곳이다. 그곳 역시 빼어나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아니 한겨울이었음에도 조금 답답한 느낌이었다.
조망 절승한 절터에는 고승이 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수도처는 오히려 평범한 듯하다. 현란한 풍광을 누리며 활짝 열리거나 드높이 걸린 빼어난 곳이 아니라, 적당히 닫히되 막히지 않고 높으되 위태롭지 않아 안정감을 으뜸으로 삼을 만한 곳.
뜬금없는 횡설수설이지만, 여하튼 묘향대의 입지와 조망은 매우 인상적이다.
총총 내려선 이끼폭.
그런데 이 무신 조화일까, 폭포에 다가서는데 문득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폭포를 향해 카메라를 드는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세자릿수까지는 아니지만 여태 지리산을 수도 없이 올랐는데 아직 공덕이 부족했던가...
순식간에 한밤중으로 변한 계곡, 폭우 속에서 검푸른 폭포벽의 수많은 물줄기들은 더욱 희게 빛난다. 맹렬한 광채를 뿜으며 펼쳐지는 빛살로 흘러내린다. 잠시 환각한다. 폭포는 물이 아니라 빛이다. 떨어지는 물이 아니라 빛으로 태어나는 물, 빛으로 사라지는 물이다.
폭우에 온몸을 내맡긴 채 망연히 바라본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세상 끝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저토록 아름다운 세상 끝이라면 수없이 다시 다가서도 좋으리라. 마침내 혼조차 뺏기고 몸 또한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할지라도...
성삼재에서 본 회오리 구름
반야봉과 멀리 삼봉산
피아골 굽어보며
좀 더 당겨서...
지천으로 피어난 둥근 이질풀
노루목에서 돌아본 노고단 쪽 주릉
노루목에서 본 삼도봉과 남부릉
반야봉에서 본 삼도봉
산 오이풀
중봉 원추리
묘향대에서
이끼폭 - 급하게 찍느라 플래시가 잠긴 것두 모르고...
어둔 사진을 조금 밝게 만들었더니 정말 <지옥의 묵시록> 같은 기괴한 이미지가 되어 버렸음
렌즈에 빗방울이 묻어서리...
언제 폭우가 있었냐는 듯 금세 햇살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