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 월악 수리봉은 없었다 (021208)
코스 : 황강영당 - 수리봉 - 석문봉 가는 삼거리 - 구례골(?). 당초 예정은 용마산까지
왜 눈 내리는 곳은 또 하나의 막다른 세상 혹은 새로운 나라인지 알 것도 같다. 모든 길은 참으로 연면(連綿)이라고,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끝없음이라고만 알았다. 내리는 눈발로 하염없이 오는 은(銀)세상, 길의 연면함은 배반당한다. 눈의 나라는 기억 저편 또 하나의 세계를 세우며 길을 지운다. 아니 혹독하게 빼앗아간다. 저리 곧게 뻗은 나무에도 얹힌 눈의 빛은 모처럼의 그늘을 지우고 온통 환하다.
눈 내리는 숲길은 맨 처음 열리는 길이어서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늘 새벽을 누리는 빛이다. 어제 머물렀던 마지막 어둠이 가장 일찍 그 길을 간다. 우리 가는 길이 열린다. 기어이, 마침내... 따위로 뜬금없이 솟는 부사처럼 오랜 하늘의 먼지처럼 말없이 옆으로 오는 눈발들, 천지를 새로 쓰는 단호함에도 바람은 휘날리지 않았다.
설국(雪國)이란 한 시절의 끝, 그러나 이후 아무것도 오지 않을 마지막의 지속이며 영원한 그늘의 그늘이다. 먼 능선 겹쳐져 빛깔 다른 날망들이 하염없이 좋았던 시절, 사이사이 열려있을 계곡들로 그리움 지그시 번져 내려도 좋았을 날들. 그러나 어느 날 한 허공 묵묵히 열려 벼랑 끝에 서서도 막막하니 등 시린 나절, 살아 있는 수직을 가누어 이끌며 길은 곧장 비탈이 되고, 지난 가을 숨진 무리들은 흩어지는 눈 위로 번진다. 엊그제의 서늘하던 바람과 일렁이던 푸른 어둠을 기억한다.
이런 날의 길이란, 이런 눈길을 눈발 속으로 가는 길이란 차마 조심스럽고 아득하여 하염없이 밀고 또 밀어 저 어둠 없는 세상 물빛의 갈래로 흘러가는 일인데, 새벽으로 나선 도회것의 사업이 도대체 무슨 바램 있어 예서 이토록 서성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맑게 흐르던 송계 건너 솟아 있을 월악은 흔적도 없고, 눈맞고 선 나무, 나무들... 길 끊겨 막막히 선 나를 지나 알 수 없는 저 희디희고 밝은 세상으로 끝없이 흘러간다. 무덤 우에 덮인 눈, 石氏 성을 가졌던 백골은 참으로 따스하게 웃고 있을 것인데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양식을 일용한다.
모든 눈발은 늘 시초의 세계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다. 문경 지나 이화령 전후하여 눈의 세상, 저런 단조로움은 공포에 가깝다. 세상의 마지막은 저런 모습이리라 상상한다. 천지(天地)는 불인(不仁)이니, 묵시(黙示)의 풍경은 오늘에도 있고 내일 또 있을 것인데, 모든 맨 처음과 끝이 저러할 것이니 - 집나서면 거기가 곧 피안, 다만 한 걸음 고개만 돌리면 될 일이라 속수무책의 저 황량함이 오히려 빛이라니, 세상이 빛으로 하여 비로소 이루어졌고 빛으로 끝나리란 암시인가.
황홀에 넋 놓아 죽음인 잠이 번져드는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걸으며 갈증도 모른 채 오르는 수리봉. 가 버린 세상이 마침내 어디 닿아 있을지도 모르며 텅 빈 투명함만이 저 빛을 달려가 빈 나무에 꽂히는 화살처럼, 가장 작은 눈송이처럼 천지를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또한 눈 세상은 단순 명료한 것이라서 발아래 뒤집어지며 낙엽과 흙 쏟아 길 아닌 길을 내며 온통 산빛을 어질러 놓는다. 좀 더 쌓이고 쌓여야 할까. 다져지는 무게가 모자란 것인가. 쏟아지는 비탈 아무리 가팔라도 나무는 기울어 자라는 일 없어, 평생을 두고 수직과 수평을 다투며 흔들리는 마음만 혼자 뜨겁다.
원근의 사라짐은 다만 불편할 뿐일까. 길 위에 갇혔다고 여겨져 문득 길을 잃고 쏟아져 내리는 것인가. 아쉬움은 산 너머 계곡 너머 하늘에 있고 빛 삼아 가리라던 나무들은 슬금슬금 제 길을 흘러간다. 누가 누구에게 길을 물으랴, 기다리는 곳도, 안타까운 그리움 하나도 없는데...
길을 끊는, 그 자체로 자립하는 완전한 황홀. 그것은 최면이며 어떤 ‘밝게 눈 떠 있음’도 거절하는 순수한 도취다. 돌아오는 길은 없다, 눈 내림은 퇴로의 차단이다. 영원히 여기에 머물라는 마법의 주문이다. 매 순간 눈은 움직임의 흔적을 지운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하나의 나라가 된다. 모든 것이 가능한 순수한 현재에 머물며 어떤 역사도 미래도 갖지 않는, 불멸조차 초월한다. 새로움도 없고 사라짐도 없기에 머무름도 없다. 가장 덧없는 오직 순간만이 있는, 찰나 즉 영원의 세계다.